반항아 형이 없었다면, 세종대왕이 우리 곁에 없었을지도….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조선의 왕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어보면 아마 100중 90은 세종대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이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태종의 뒤를 이을 세자는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난 양녕대군(이하 양녕)이었다. 양녕은 어린 시절부터 그 총명함을 인정받아 태종 4년에 11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총명하기만 하던 양녕의 태도가 변했다. 매일같이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사냥을 하고 노는 것에만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녕의 태도가 변한 것은 태종이 첫 번째 부인인 자신의 어머니를 소외시키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외삼촌 민무구 4형제를 죽인 후 부터였다. 태종에 대한 반항심이 일어난 것이다.
양녕은 태종이 자신의 글공부를 위해 지어준 연당 지붕의 기왓장을 깨버리기도 하고 연당 기둥을 활로 쏘아 맞추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하루는 태종이 강원도 평강으로 사냥을 나갈 때 복통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더니 그 길로 성 밖에 나가 놀고 동궁 안으로 기생을 불러 음주가무를 즐겼다. 이런 양녕에게 태종이 여러 번 주의를 주었지만 그때 뿐이었다.
태종은 양녕을 결혼시키면 방탕한 생활을 그만둘 것이라 기대하고 양녕이 14세가 되던 해에 김한로의 딸과 결혼시켰다. 하지만 양녕은 태종의 기대와는 달리 철이 들기는커녕 중추부사 곽정의 소실인 어리라는 여자가 미인이라고 소문이 나자 어리를 빼내어 임신을 시켜 대궐로 들였다. 이런 양녕을 보면서 태종은 양녕이 빨리 마음을 잡고 제대로 세자노릇 하기를 바랐지만 양녕은 태종의 뜻대로 행동해 주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태종은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 충녕(세종의 즉위 전 군호)을 왕세자에 즉위시키게 된다. 이때 충녕이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대왕이 될 운명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양녕이 폐위되기 전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하 효령)은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양녕이 폐위되면 당연히 자신이 왕세자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행동을 주의하며 글 읽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태종은 효령의 마음이 유순하고 약하여 나라를 이끌어가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해 왕세자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충녕이 왕세자로 책봉되던 해에 양녕대군은 왕세자 자리에서 폐위 당했고 효령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중이 된 효령은 불도에 전념하며 1465년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번역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왕을 거쳐 91세기까지 살면서 불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양녕은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폐위 후 대신들로부터 수십 차례 탄핵을 받았지만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양녕은 후에 한양 근처 경치가 좋은 곳을 돌아다니다 67세가 되던 해에 생을 마감했다.
김의한 기자
han@kunsan.ac.kr
*참고
박찬희,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 희망, 2011
장학근, 『우리가 몰랐던 조선』, 플래닛 미디어,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