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목에 대하여
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태풍이 잦았습니다.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요. 하지만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 추석 명절까지 지나니 문득 가을이 깊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부신 가을 햇빛에 반반씩 출렁이는 요즘입니다.
이 작품은 읽기가 쉽습니다. 태풍에 나무가 쓰러집니다. 나무를 일으켜 세우고 그 둘레에 각목으로 버팀목을 받쳐줍니다. 나무가 다시 튼튼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팀목은 지지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정황입니다. 그런데 시적 상상력은 이 일상적인 정황에 놀라운 인식의 전환을 부여합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비록 쓰러지긴 했어도 살아있는 나무이고, 반면에 버팀목은, 이미 베어져 절단된 각목이니까 말하자면 죽은 나무이지요. 그런데 지금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선 것입니다. 결국 “죽음에 빚진 채 삶은 / 싹이 트고 다시 / 잔뿌리를 내립니다.”
버팀목은 물론 이미 죽은 각목이므로 나중에 제거되거나 아니면 썩거나 삭아서 결국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인식의 전환이 또 일어납니다. 태풍에 쓰러졌던 나무는 처음에는 버팀목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었겠지만, 나중에는 큰바람이 불어와도 눕지 않는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정말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는 나무와 버팀목에 대한 얘기입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사람의 일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삶을 지탱해주고 버텨주는 것은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웃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전의 아버지와 이웃들이 삶의 버팀목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쯤 읽으면 문득 조상의 음덕이 생각나기도 하는데요. 음덕이란, 조상들께서 그 후손에게 금방 나타나는 어떤 구체적인 이득을 준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다는 인식처럼, 우리 삶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것, 음덕이라는 것도 말하자면 바로 이런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나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삶의 버팀목이자 음덕이 되어야 마땅하겠지요.
자, 지금 당신은 누구를 삶의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지요. 그리고 버팀목, 우리가 탱주라고도 하는 지지대의 역할을 누구에게 해주고 있는지요. 가을이 깊으면 질문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강연호(시인, 원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