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봄밤
              이윤학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이 너무 많다.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틈이 너무 크다.
캄캄함을 흔드는 개구리 울음 속에서
코 고는 아버지, 밤새워 비탈길 오르시는 아버지,
어금닐 깨물고 계시는 아버지.

불 끄구 자라, 불
끄구 자야 한다.

오십 몇 년간, 밤새워 비탈길 오르시는 아버지.

불을 끌 수 없다, 불을 끄고
캄캄해질 자신이 없다. 혼자가 될
자신이 없다.

비탈길 위에는 밤하늘이 있고
울음과 안간힘과 끈덕짐을
먹고사는 별들이 있다.

부자가 누워 있는 작은 별의 방은
언제나 비탈길 맨 아래에 있다.


봄날이나 봄밤이면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이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게 마련입니다. 아마 새봄의 정취가 우리를 매혹시키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와 비교하여 우리네 살림살이가 새삼 속절없어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봄밤엔 보이지 않는 문”이 많고, “보이지 않는 문틈”도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이 작품에서도 화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주무시며 “밤새워 비탈길을 오르시는 아버지”를, 그리고 “어금닐 깨물고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비탈길을 오르고 어금니를 깨무는 것은, 우선 아버지의 곤한 잠과 그때의 잠버릇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이 시행들은 이처럼 잠버릇만을 단순히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온 고단함까지 포괄하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평소에 화자에게 불을 끄고 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당부하셨던 모양입니다. 전기세나 수도세 등의 공과금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던, 과거 우리네 살림살이의 한 축도를 떠올리게 하는 당부이지요. 하지만 지금 화자가 정작 불을 끄고 캄캄해질 자신이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어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세상의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될 자신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세상의 캄캄함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게 바로 가족의 의미인 것 같네요. 이 작품은 이처럼 “울음과 안간힘과 끈덕짐”으로 삶을 견뎌야 한다는 절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얼핏 일상의 평범한 세목을 그린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를 통해 삶에 대해 포착하고 있는 인식과 통찰은 놀라운 깊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