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기억의 습격 <건축학개론>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은 아마도 「건축학개론」일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199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의 감수성을 관통한다. 게스티셔츠, 삐삐, 압구정과 같은 기호들은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읽었던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공백을 빠르게 메꿨다. 세련됨과 낭비, 취향과 소비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의 지점을 찾아야했던 세대, 90년대 학번들에게 있어 20대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기도 했다.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세대들, 그들의 기억 핵심에 바로 이 영화 「건축학개론」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학 개론」이 첫사랑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을 환멸과 동의어에 두었다면 토마스 만에게 첫사랑은 타협을 요구하는 “시민”의 요구였다. 작가가 되는 길과 첫사랑이 요구하는 출세의 길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이 다루는 첫사랑은 이와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기보다는 누구나 다 한 번 쯤 겪어봤을 법한 실수에 대한 기억으로 그려진다. 사랑한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에둘러 공격하고 좋아한다 말하면 그만인 것을 상대방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 말이다.
영화는 30대 중반이 된 두 남녀와 스무 살 무렵의 두 남녀를 각기 다른 배우를 통해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이십 대와 삼십 대는 다른 배우가 필요할 만큼 커다란 시간의 격차일 지도 모른다. 외모야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니 말이다. 가령, 좋아하던 여자의 눈조차 마주치기 떨려하던 스무 살 청년은 서른다섯 살 쯤 되면 아무렇지 않게 덥석 손잡게 된다. 망설임도 그렇다고 설레임도 없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사라진 만큼 사람이나 사랑에 대한 기대감도 줄어든다. 그런 점에서 「건축학 개론」의 더블 캐스팅은 사라진 순정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되어 준다.
누구에게나 이십 대는 있지만 아무도 이십 대에 머물 수는 없다. 젊음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향유하지도 못한 채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놓쳤다는 것, 대개의 첫사랑 서사가 기대고 있는 아쉬움이다.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떠올리는 것은 바로 덧없이 흘려보낸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만큼 중요한 소재는 “집”이다. 감독 이용주는 집을 짓기 위해선 그 사람의 취향이나 성격을 알아야만 하는 데, 그건 꼭 연애와 닮아 있다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이 집은 “가정”이라는 의미로 환유되는 연애의 거주처이기도 하다. 연애하는 사람들에게 “집”은 다소 먼 개념이다. 집을 갖는다는 것은 결혼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은 연애의 어떤 귀결점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스무 살 젊은 연인이 누군가 버리고 간 빈 집에서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인지 더 애틋하다. 그들의 사랑이란 그렇게 빈 집으로 남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는 누구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첫사랑의 흔적이 이 빈 집 같은 것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결혼사진부터 아이들의 백일이나 돌 사진까지 가득한 현재의 집이 아니라 추억의 부스러기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순정의 공간으로 말이다.
90년대는 “너 어디사니”라는 질문이 상대방의 계층적 현재를 묻는 질문이 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다. 정이현의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말하듯 “반포”에 산다는 것은 “미아리”나 “수유리”에 산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제주가 고향인 서현이 서울의 학교에 진학해, 압구정이나 방배동 혹은 서초동 어딘가에 살고 싶어 하는 모습은 이런 당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집을 지어주고 현재의 아내의 곁으로 가는 남자의 마음은 어쩐지 첫사랑이라는 부채를 빈집처럼 안고 사는 남성 심리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첫사랑을 남성의 관점에서 추억하는 영화 바로 「건축학개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