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의 정체성과 역할
사람만큼 신체적으로 미약한 종자가 있을까? 뛰긴 하지만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헤엄칠 수 있으나 물개처럼 날렵하지 않은 게 사람이다. 나무에 오를 수 있으나 원숭이만 못하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갖지 못해 날고기를 씹을 수 없다. 뱀 마냥 온도 변화에 민감하거나 잠자리처럼 시야가 사방으로 뻗쳐 있는 것도 아니다. 5킬로미터 상공에서도 쥐를 식별할 수 있는 매의 눈과 100미터 거리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토끼의 귀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사람은 어떻게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계에서 멸종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걸까? 게다가 진화를 거듭해 만물의 영장이 되었으니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커뮤니케이션에 있다.
인류는 의사소통에 기반을 둔 협업을 통해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했다. 말을 하기 이전에는 몸짓 커뮤니케이션을 활용해 힘세고 재빠른, 심지어 날아다니는 동물을 사냥했다. 먹고 마시는 기관에 불과했던 입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커뮤니케이션을 향한 지대한 욕구의 소산이다. 말의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발명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인류는 의사소통함으로써 생을 이어나간 것은 물론 고유의 문명을 이루고 문화를 가꾸어 온 것이다. 몸짓과 말?글은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한 인류의 보고(寶庫)였다.
인간은 단 한순간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그 속도는 눈에 부실 정도였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신문이 등장했고 전파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디지털 기술은 컴퓨터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즉 인터넷은 오늘날 인류의 소통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다.
인류 최초의 매스미디어로 등장한 신문은 많은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토론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고안되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권력집단을 감시?비판하고 약자를 대변하며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는 ‘언론’의 전형을 신문이 창출했다. 언론에 으레 따라붙는 '감시견(watch dog)'이란 애칭, 입법부?사법부?행정부에 이은 ‘제4부’란 별칭, ‘시대의 파수꾼’이란 호칭도 따지고 보면 신문의 기능과 역할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람이 모여 일정한 활동을 영위하는 공간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필히 요구된다. 신문은 소통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원활하게 하는 매개체다.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큰 규모의 신문이 있는가 하면 작은 생활반경을 범위로 삼는 신문도 있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신문과 특정 취향?기호를 가진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전문 분야를 깊이 있게 다루는 신문이 공존한다.
무엇보다 ‘대학’과 ‘신문’은 멋진 궁합을 이룬다. 대학 자체가 사회의 특수한 축소판인 것은 물론 자유로운 비판정신으로 진리를 탐색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감시?비판하고 핵심 이슈에 대한 의견 개진과 토론, 나아가 합의 창출을 추구하는 신문과 닮은꼴이다. 대학과 신문이 결합한 ‘대학신문’은 대학 고유의 이념에 부합할 뿐더러 신문, 그 이상의 신문 기능을 구현할 수 있는 마당인 것이다.
대학신문이 위기라고 한다. 당연하다. 우선, 신문 자체가 위기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방송 매체에 비해 열등한 현장성, 인터넷 매체보다 늦을 수밖에 없는 속보성 등에서 기인한 피할 수 없는 추세다. 또한 우리나라는 학생 수 감소 등에 따라 대학의 위기 담론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느라 대학마다 취업에 불리한 인문학을 천시하고 세칭 인기학과 위주로 학제를 개편하면서 대학 고유의 정체성이 훼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문과 대학이 개별 영역으로서 위기인 마당에 대학신문이라고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터이다. 오늘날 대학신문의 위기는 대학과 신문의 위기가 초래한 파생물인 셈이다. 흔한 말이지만, 위기의 또 다른 이름은 기회다. 대학신문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 활로를 개척할 방법이 없지 않다는 의미다. 그 출발점은 변화된 환경에서 대학신문의 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바로 그 문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신문의 위기를 풀기 위한 열쇠도 대학과 신문의 위기에서 찾는 게 정공법이고 이치에 맞다.
먼저, 신문의 위기에 관해서다.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신문이, 방송이나 인터넷에 비해 열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목할 현상은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유독 신문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전문가는 이를 신문에 대한 신뢰의 위기에서 찾는다. 한국언론재단과 한국광고주협회 등의 일관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구독률과 열독률이 해마다 하락세를 거듭함과 동시에 신문에 대한 독자의 신뢰도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 사회적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뉴스와 정보를 다루는 언론에게 신뢰도는 ‘밥줄’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신문의 신뢰도 하락은 새로운 경쟁 매체의 출현보다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학신문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학내 구성원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연 어느 지점에서 틀어진 걸까? 이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혹시 대학신문은 자신이 대변해야 할 학생들의 목소리를 매개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나?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일방적이고 규범적인 의제에 치중한 것은 아닐까?
2000년에 창간해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신문 열풍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가 <오마이뉴스>다. 오연호 대표는 1997년에 우연히 한 신문사의 텔레비전 광고 카피를 보고 <오마이뉴스>를 구상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방한과 시골 어머니의 상경, 어느 것이 더 소중한 뉴스입니까?”였다. 학생 개개인에게 벌어진 ‘시골 어머니의 상경’ 같은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를 지면에 담으려는 자세가 신뢰 구축의 지름길이다. 개인사에는 종종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고 그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다음으로, 대학의 위기는 사회 구조적으로 해소할 성격의 문제로 대학의 노력만으로는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작년 초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이었던 김예슬 양이 자퇴를 선언하며 교정에 붙인 전지 3장 분량의 대자보는 오늘날 대학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업체가 되었다.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상아탑’이거나 ‘지성의 전당’이기는커녕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되고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대학(大學) 없는 대학’을 만든 건 결코 학생이나 대학신문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신문이 나서고 대학의 일주체인 학생들의 인식이 바뀌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한 트위터리안(@smle)의 말마따나 “기업이 요구하는 ‘즉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올해 대졸자’라는 것은 ‘요부 같은 처녀’ … 즉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일 뿐임을 새겨야 한다. 대학은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니다. 대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미치도록 바다를 그리워하게 만들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박태환처럼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큰 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할 것이다.
대학신문의 정체성을 따로 정리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본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상기하고 대학을 바로 세우려는 구성원의 고민 속에서 저마다의 색깔로 재탄생할 것이다. 다만,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1935년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 서두에서 꺼낸 말을 전하고자 한다. “The difficulty lies, not in the new ideas, but in escaping the old on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