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문학의 등장과 유사 다문화주의를 넘어

1980년대까지 한국문학에서 주한미군, 양공주, 혼혈아는 세트메뉴였다. 이 3명의 배역 비중은 작품에 따라 달라졌지만 이들은 대개 함께 등장했다. 식상할 정도의 세트메뉴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국제 분업 속에 한국은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들을 많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오면서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인적 구성도는 급격하기 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문학에서 ‘단일민족 신화의 허구적 기만성, 배타적 차별과 착취, 소수자적 외국인, 다문화주의’가 뒤섞인 신종 세트메뉴가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통해 발전한 한국의 국력과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향한 경멸과 기본적 인권마저도 무시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2012년을 기준으로 외국인 숫자는 140만명(2.8%)을 넘어섰고 갈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특히 아시아 출신 결혼 이민자 여성의 급증은 한국 정부의 배타적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2005년부터 한국의 정부는 특히 결혼 이민자를 중심으로 하는 다문화 정책과 다문화 담론을 생산했다. 당대 현실을 반영하는 한국문학도 ‘다문화’ 작품들을 발표해 바람직한 다문화의 공존 방식을 고민했다. 다문화 문학의 주요 대상자들은 탈북자인 새터민, 연변 조선족, 혼혈인, 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이다. 이 중에서 한국의 작가들이 좀더 관심을 쏟은 것은 인종적·민족적 이질성을 띤 혼혈인, 아시아 이주 노동자, 결혼 이민자이다. 한국의 다문화 문학은 이들 이질적 소수자에 대한 동정과 죄책감의 노출, 한국인들의 배타적 차별에 대한 반성, 문화적 갈등 극복을 위한 상호 공존 가능성의 모색을 다루고 있다.

2000년대 한국의 다문화 문학의 물꼬를 튼 작품은 이주 노동자와 혼혈인의 문제를 다룬 김재영의 「코끼리」(2004)이다. 이 소설은 혼혈아가 한국 여성과 주한미군 사이에서 출생하는 종래의 공식을 깨뜨렸다. 네팔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3살의 아카스는 출생 신고도 하지 못했기에 한국에서 학교를 정식으로 다니지도 못한다. 가난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가출을 했고, 혼혈아 아카스는 다니는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다. 이 소설에서 ‘다름’은 ‘차별과 열등’의 의미로 유통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시아 이주 노동자는 “한국 사람들은 단일민족이라 외국인한테 거부감을 찾는다고? 그래서 이주노동자들한테 불친절한 거라고? 웃기는 소리 마. 미국 사람 앞에서는 안 그래. 친절하다 못해 비굴할 정도지. 너도 얼굴만 좀 하얗다면 미국 사람처럼 보일 텐데…….”라는 발언을 한다. 아카스는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처럼 되고 싶어 매일 탈색제를 풀어 세수를 하고, 피부가 하얗게 각질이 생긴다. 이러한 서글픈 풍경은 단일민족의 신화와 근거없는 민족적 우월감이 만들어낸 상처이다. 김중미의 장편 「거대한 뿌리」, 김려령의 장편 「완득이」, 한수영의 장편 「플루토의 지붕」 등도 혼혈아가 등장하는 다문화 문학이다.

이 중에서 영화화 되기도 한 「완득이」(2008)의 주인공 완득이는 캬바레에서 춤을 추는 난쟁이 한국인 아버지와 결혼 이민자인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완득이는 어머니의 존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버지의 부끄러운 직업과 난쟁이라는 신체 불구, 경제적 궁핍 속에 고독하게 성장했다. 완득이는 가정의 불우한 형편과 어머니 부재라는 콤플렉스를 지녔지만 인종적, 민족적 콤플렉스는 느끼지 못한 채 성장했다. 완득이는 고등학교 담임인 동주가 어머니의 존재를 말해주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동주 선생은 아시아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의 권익 찾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보적 지식인을 상징한다. 중요 작중인물인 완득이와 동주는 성장하면서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차별과 배제의 양상은 제한적이다. 완득이는 욕쟁이 동주 선생님의 도움 속에 닫힌 세계에서 나와 한국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희망을 보여준다. 다문화 문학의 텍스트가 암담한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데 「완득이」는 희망 찬 미래를 보여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한국의 다문화 소설에서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는 한국 사회에서 침묵하는 타자로 대개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과 달리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소설이 박범신의 장편 「나마스테」(2005)이다. 이 소설에서 한국 여성과 결혼한 네팔 출신 노동자 카밀은 “한국에는 법, 없어요. 한국 사람 지켜주는 법만 있어요. 미국 사람, 프랑스 사람, 영국 사람, 지켜주는 법 있어요. 그러나 네팔 사람, 스리랑카 사람, 필리핀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지켜주는 법 없어요.”라고 말한다. 카밀은 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위해 시위, 농성, 더 나아가 분신과 투신 자살로 맞서 싸우다가 비극적으로 숨진다.

2000년대 들어 다문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시인은 하종오이다. 그는 시집 「반대쪽 천국」,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입국자들」, 「제국」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종오는 「코시안리」라는 시에서 “베트남에서 시집온 젊은 아내는/ 한국어 이름 지어주기 바랐다/ 풀도 국경 넘으면 그 나랏말로 불리고/ 나무도 국경 넘으면 그 나랏말로 불리고/ 벌레도 국경 넘으면 그 나랏말로 불리는데//한국인 남편은 모른 척했다/ 한국어 못 한다고 나무라기만 하고/ 왜 베트남어 배우려 하지 않는지”라고 비판적으로 노래한다. 시인은 일방적 방향으로 진행되는 한국의 동화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던 것이다.

한국 작가들은 탈북자와 조선족에도 관심을 보였다. 조선족 문제는 주로 조선족 여성과 한국 남성과의 결혼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 천운영의 장편 「잘 가라, 서커스」, 공선옥의 「유랑가족」이 대표적이다. 탈북자 문제는 탈북의 어려움과 정착한 한국에서 차별을 받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탈북자 문제는 정도상의 소설집 「찔레꽃」 등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찔레꽃」의 주인공인 젊은 여자는 탈북하여 중국 공안에 잡혔다가 어렵게 남한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북한의 가족 생활비, 탈북 관련 소개비 때문에 남한의 노래방에서 2차를 나가 몸을 파는 매춘부로 전락한다. 탈북자는 남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보다 계급적, 문화적 차별 속에 새로운 빈민층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다문화 문학은 빈민촌이나 변두리 공장 지대라는 공간적 배경을 자주 등장시켜 이주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보여주었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는 악덕 한국인 기업주나 폭력적인 한국인 남편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피해자로 종종 형상화되었다. 다문화 소설에서 주인공이 미성년이나 한국인으로 설정하여 서사를 전개한 것은 한국 작가가 다른 아시아인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작가들은 한국의 다양한 차별과 배제를 제한적 형태로만 보여줄 수 있었다. 한국 작가들이 다문화 문학 텍스트에서 한국인이 ‘보는 주체’로, 이주 노동자나 탈북자 등이 ‘보여지는 타자’로 대개 설정되는 것도 다문화 문학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의 다문화 문학이 좀더 성장하려면 한국 작가들이 좀더 공부를 하여, 성년인 외국인이나 그들의 눈을 통해 서사의 형상화가 전개되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 문학은 한국의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반성을 촉구하며 다문화적 지평을 넓힌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의 다문화 문학은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다문화주의는 기존의 지배적 문화가 개별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소수문화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대할 때 일종의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로 대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다문화 가정을 도움의 대상으로만 보는 우월한 주체의 시선도 시정되어야 한다. 한국은 다문화 정책과 다문화 담론이 존재하지만 자민족 중심의 동일성의 논리가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 한국은 진정한 다문화 사회가 아직 아니다. 유사 다문화주의가 현재의 모습이다. 2010년대의 다문화 문학은 유사 다문화주의를 넘어 다양한 타자들이 공존할 수 있는 신종 세트메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민족과 국가의 폐쇄적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문화 문학은 유연한 사고가 번성한 곳에서만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