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지>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데미지>라는 제목이 암시하지만 이 작품은 치명적인 사랑을 소재로 삼고 있다. 1992년 논란의 한 가운데서 개봉했던 영화는 2012년 십 년만에 다시 한국 관객에게 선보인다. 엄혹하면서도 비논리적이었던 삭제에서 벗어나 무삭제된, 감독의 의도 그대로의 작품으로 말이다.
일련의 막장 드라마같은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상징계적 지위와 여자, 안느의 상처, 트라우마이다. 우선,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공인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세련된 옷차림의 그가 점점 벌거벗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 어떤 역할을 하는 누군가의 사위라는 이름은 스티븐 플레밍을 수식하는 형용사들이면서 한편 그의 욕망과는 동떨어진 사회적 호명이기도 하다.
시아버지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스티븐은 안나를 보며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나 상징계적 호명 아래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둘씩 이름을 벗듯 옷을 벗어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과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두 사람이 이탈을 선언한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한편 안나는 어린시절부터 사랑했던 한 남자를 잃은 후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박탈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심각한 것은 그 남자가 바로 친오빠였다는 사실이다. 그녀 역시 그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남녀간의 것으로 깊어지지 못한다. 그녀는 철저히 질서를 존중하는 호명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자신을, 그냥 자신을 사랑해달라 요구하지만 그녀에게 오빠는 사랑했지만 친족인 금기이다.
오빠는 그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제 오빠-금기는 상처가 되어 그녀를 일종의 감정적 불능상태로 몰아간다.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지만 한편 누구나 다 사랑할 수 있다. 결국 안나는 자신과 오빠를 불행으로 이끌고 간 사회적 호명의 질서 한 가운데로 걸어가 그것을 갈기 갈기 찢어 놓는다. 하지만, 이 위험한 도박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아버지 스티븐은 아들의 사체를 껴안는다. 태어날 당시, 핏덩이의 나체였을 아들을 나신이 된 스티븐이 껴안는다. 아들은 스티븐으로 인해 세상에 태어났지만 한편 그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데미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파괴적인 작품이다. 질서와 욕망의 근간까지 파고들어 뒤흔드는 루이 말의 솜씨는 다시 봐도 여전하다. 깊이감을 알 수 없는 쥴리엣 비노쉬의 눈빛과 결코 욕망하지 말아야 할 것에 눈이 먼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도 생생하다.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