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와 헤로데 대왕 - 미셸 투르니에

우리는 자주 가던 장소에서, 아니면 자주 만나는 상대의 얼굴에서 또는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들 속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예전부터 거기 있었음에 틀림없다. 다만 어느 한 순간의 우연이 그 작은 발견으로 이끌고 또 때로는 지겹기만 한 일상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축복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기도 한다. 어쩌면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것은 우연이 만들어 주곤 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 자들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되도록 자신의 일상을 일정한 계획 하에 두려고 노력한다. 사회적 공인을 받은 계획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신이 계획한 영역의 바깥을 접하게 되면 그것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거나 아예 배척하기 일쑤이다. 지키지 못하는 약속시간(어떻게 정확히 시간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일찍 도착하거나 늦게 도착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 할 텐데), 배신하고 떠나는 연인, 늦게 도착하기만 하는 열차, 마음먹은 대로 끝나지 않는 일들, 절약하고 절약해도 목표대로 모이지 않는 돈 등등…….
 어쩌면 가장 계획하기 힘든 것이 우리의 삶 그 자체 일 텐데 우리들은 한사코 스스로의-강제된 계획표 속에 모든 것을 구겨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우연히 얻어지는 즐거움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 채 말이다. 이 소설은 마치 이런 방식으로 삶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소설속의 인물 가스파르, 멜쉬오르, 발타자르, 타오르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보다 나은 것을 찾기 위해, 그도 아니면 막연하게라도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필연의 과정으로서 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우연들을 만나기 위한 것. 주인공들은 여행 중에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우연히 한자리에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연하고도 필연적으로 헤로데 대왕(헤롯 왕)을 만나서 동일한 목표(예수의 탄생 보고)와 필연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주인공들이 여행을 끝낸 자리에서 우연이 배제된 획일적 목표를 얻게 되지는 않는다. 필연적으로 주어졌던 여행의 끝에서 물론 가장 골몰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얻게는 되지만, 소설은 목표를 해결한데서 오는 성취감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했던 가치 자체를 전도시킴으로써 오히려 목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보여준다. 
 소설 전편에 걸쳐 작가가 주제에 가까운 인물로 내세운 타오르는, 소설 속의 인물들 중 가장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목표는 가장 확실한 동시에, 다른 인물들의 목표와 비교해 보았을 때 제일 보잘 것 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피스타치오를 넣은 라아트루쿰'이라는 과자 제조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시작한 여행에서 타오르는 ‘야스미나’라는 가장 아끼는 코끼리, 또한 가장 아끼던 충신까지 포기하거나 잃게 된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타오르는 이미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더 크고 본질적인 것을, 우연히(!) 얻게 되었으니까…….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을 공부하고 교수가 되려고 했으나 자격시험에 실패한 뒤, 출판사 근무를 거쳐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면 좀 늦은 나이인 43세에 처녀작을 발표하고 이내 성공한 작가의 길을 걷는다. 프랑스 시골의 어느 작은 마을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매체와의 접촉도 꺼리는 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아마도 그 역시 자신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우연들을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고 지금 현재의 삶에 도달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작품은 물론, 데뷔작인 「방디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 2003) 등 많은 작품을 성경이나 「로빈슨 크루소」같은 일종의 정전(Cannon)들의 틈에서 발견한 우연들을 확장한 방식의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처럼 여행은, 그리고 우리들의 삶은 우연을 얻어내기 위한 계획들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