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 그 지순한 사랑이 그을려버린 사연, 잘못된 역사에 대한 예리한 분노의 표현
사실 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막힌 우연이나 강렬한 극단성 혹은 인위적 정밀성 등이 개입되어야 하며, 특히 픽션일 경우 이러한 우연, 극단, 인위 등은 게으른 작가가 무심한 소비자들의 주의를 강제하기 위해 손쉽게 동원하는 전략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때로 선정주의 혹은 막장드라마라 부르기도 한다. 『그을린 사랑』은 일견 막장드라마의 요소를 고루 갖춘 듯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에서 내가 얻은 것은 통렬한 고통과 묵직한 감동이었다. 그만큼 영화 속 이야기의 부자연스런 강렬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남다른 것이었으며, 또한 매우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캐나다의 한 여인이 죽음을 맞으면서 자신의 쌍둥이 자녀에게 복잡한 유언들을 남긴다. 아버지와 형제를 찾아내어 별도로 작성된 유언장을 개봉하기 전까진,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내용과 함께, 중동 지역의 언어로 쓰여진 빛바랜 여권과 자신의 흑백사진 하나만을 남긴 것이다. 이에 자식들이 현재의 시점으로 엄마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과, 엄마가 겪었던 고통스런 체험의 플래시백이 교차하면서 영화는 130분의 여정을 진행시켜나간다. 이들이 조우하는 역사의 현장은, 1970년대의 레바논 근처의 어느 지역! 기독교와 무슬림, 난민과 폭도 및 군대가 어지럽게 관통하면서, 집단적 박해를 경험하고 또한 그에 대한 부정확한 복수를 감행하던 현장이었다.
망자는 기독교부족 출신의 여성으로서 무슬림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연인이 오빠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출산한 아이는 출생 직후 난민촌의 고아원으로 보내어지는 과정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 그녀가 과거를 고향과 의식 속에서 지워내기 위해 도시의 대학에 보내어져 수학하던 중 부족과 종교간 분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자신의 아이가 있을 지역의 집단학살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공기를 떠돈다. 여인은 거의 맹목적으로 아들을 찾기 위해 그 고아원을 찾아 해매고, 결국 아들을 찾는 대신 부족간, 특히 기독교 도당의 무슬림 양민에 대한 집단적 학살 현장을 몸서리치게 목격한다. 이에 대한 개인적 응징을 위해, 급기야 그녀는 민병대장을 암살하게 되고, 그들이 만든 감옥 속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고문을 처절한 경험으로 소화해내어야 했다. 악명 높은 한 젊은 민병대원에 의한 여러 번의 강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을린 사랑』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따라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연적이고 극단적이며 인위적인 구성을 갖춘 이야기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그리스 비극을 닮은 형태로, 『그을린 사랑』은 고대의 비극과는 사뭇 다른 함의를 역사와 삶에 대해 제공하려 하고 있다. 의도덕으로 시 공간이 모호하게 처리된 채로 진행되는 만성적인 내전 상황은, 그것이 중동이든 남미이든 아프리카이든 아시아든간에 20세기 이후 인류가 겪어온 국지적 전쟁을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들이 겪는 무차별적인 학대는 거칠게 요약되는 집단구분법에 따른 응징을 부르고, 이는 또 반드시 그 반작용을 일으키면서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을린 사랑』은 우리시대의 한 단면이 되어버린 이 끔찍한 불합리성을, 한 개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모순된 형태의 사랑의 상황과 그 행위 및 그에 따른 결과의 제시를 통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폭발적인 정서적 힘으로 직면하도록 하고 있다. 아마도 오이디푸스 비극의 공식을 가장 미묘하고 정밀하게 차용하면서, 영화는 잘못된 정치와 불완전한 개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그 지순한 사랑을 그토록 그을리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통렬하게 일깨우고 있다. 가장 자극적인 내용을 가장 조용하게 처리하는 미니멀리즘의 기법으로 평이한 대중성을 스스로 반납한 『그을린 사랑』은, 그래서 상업적 배급망의 한 켠에서 짦은 기간 수줍게 스크린을 지키다 사라졌다. 허나 그 견고한 콘텐츠의 단단한 저장물이 DVD 가게에서 선택을 기다릴 때 독자들은 결코 머뭇거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