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위한 글
간만에 책을 읽고픈 의욕이 솟아, 집에서 10분 거리인 도서관으로 향했다. 글에 대한 그들만의 방식을 터득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글을 취미로 둔 지 수년이 지났지만, 체계를 가지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유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필자는 손이 가는 대로 두드리는 편이다. 떠오르는 수많은 발상들을 전부 담아내자는 욕심에서 비롯된 방법이다. 하지만 전부라는 소망이 담긴 욕심은 결국 무리가 따른다. 글을 마치고 보았을 때 드러내고픈 바가 희미해지는 경우가 예사다. 코스 요리 주문해서 샐러드 먹고, 스테이크 자르던 도중 식당이 정전된 기분. 이런 필자의 글쓰기 행태를 돌아보고 참고의 필요성을 체감한다. 그렇다면 ‘선배’들은 과연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을까.
800대가 모인 책장 앞에 섰다. 검색해 둔 책을 찾기 위해 위쪽부터 지그시 바라보았다. 논술, 학술, 논문. 제목에 끼워진 이 단어들은 책장 두 줄을 지배하고 있다. 내 가슴 높이까지 시선을 내려야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지침서는 얼마나 꽂혀 있을까. 찾던 서적의 주변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줄 하나마저 채우지 못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장소의 우연일지 싶어 중고 서점과 친구 동네 도서관에서 탐색했지만, 결과는 다를 바 없었다. 공급은 수요를 따라간다고 하는데, 이 정도였나 싶다.
왜 감정을 담아두는 글을 다루는 서적은 그 양이 충분하지 않을까. 말로 드러내도 충분하니 그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탓인가. 입으로 토해내도 응어리가 풀어지는 사람은 있다. 들어줄 이가 곁에 있거나 혼자서 그렇게 해도 만족한다면 말이다. 감정을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앞서 늘여 놓은 경우에 속하지 않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어떻게 살아도 스스로 심적 부담이 없으면 그만이다. 다만 뇌를 현실에 바치느라 그 필요를 떠올릴 순간이 없다면, 실로 눈물이 나오지 않는가. 수요가 적은 이유는 대체재의 존재 혹은 인지의 부재로 여겨진다.
인생에서 요구되는 내신 독후감, 수리 논술, 취업 자소서는 한 번 썼을 법한 글이다. 그럼 ‘순수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감정을 실은 허구의 이야기, 기승전결이 뚜렷한 본인의 경험담, 줄마다 의미를 꾹꾹 누른 문장을 나열한 단문. 이런 글들 말이다. 순수문학을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머리 아픈데 굳이 복잡한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다. 이 글에서 순수를 ‘본인 의지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동’으로 정의하고 싶다. 저런 글들은 전업 작가나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은 장벽이다.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드물어, 글을 단지 평가와 학문의 소모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는가. 감정 표현의 기능을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글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고민을 비우고 표현을 접해보자. 고르기 힘들면 겉표지 그림과 제목만 따져보면 된다. 대개 그런 책들이 술술 읽어지는 경우가 많다.
독서가 힘든가? 그러면 직접 써보자. 대화를 상기하면 남 이야기 들을 때보다 내 이야기 할 때 눈에 생기가 돋지 않는가. 나에게 가장 커다란 관심을 줄 사람은 나다. 고리타분한 표현이지만 정말이다. 나를 표현하는 글귀를 적어보자. 쓰고 나서 감정이 몸속에서 흐를 수 있으면 형식은 무관하다. 침을 놓아 혈을 뚫듯 손가락으로 마음을 찔러보자. 주저하지 말고 일단 두드리자. 필자는 매끈한 논리 전개를 위해 검토를 반복하지만, 초안은 제동 없이 적어 내려간다. 보는 이가 없는데 이유 모를 눈치가 보인다면 독자가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자. 초중생 시절 아침마다 교탁에 올려놔야 하는 일기와 다르다. 서론, 본론, 결론 다 집어치우자. 일과나 계기는 중요하지 않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되 자세히 적자. 묘사의 정도가 세밀할수록 어딘가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런 지침들을 무시해도 좋으니 그냥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