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이 전하는 난폭한 진실의 공간 <피에타>
거장 미켈란젤로는 조각상 <피에타>를 완성하고 난 후,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예수의 시신을 안은 마리아가 너무 젊은 것 아닙니까?”라고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정숙한 여인은 더디 늙는 법입니다.”
과연 여인의 정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모성의 다른 이름이다. 김기덕 감독에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 준 영화 <피에타> 역시도 어머니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오욕, 기쁨과 슬픔, 배신의 시작, 그 어머니로부터 말이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상징성은 넓어지고 폭력의 직접성은 완화된 작품이다. 이런 식이다. <섬>에서 반 쯤 훼손된 몸뚱아리로 헤엄치던 물고기는 요리된 이후 남은 뼈의 잔해로 바뀌었고, 신체를 가해하던 직접적 장면들은 암시로 대체되었다. 폭력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지만 그것 자체의 표현을 통한 충격 요법은 사라진 것이다.
폭력의 직접성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에 대한 풍부한 은유들이다. 철거를 앞둔 청계천 공장 지대들처럼 말이다. 소규모 자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들에게 자본의 고리는 지옥의 열쇠이다. 300만원의 빚이 한 달 새 3000만원이 되어 신체 일부와의 교환할 것을 요구해 온다.
김기덕은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된 이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엔 그동안 김기덕이 끊임없이 추구해왔던 생의 본성에 대한 일관적 질문도 자리 잡고 있다. 어머니, 여성에 대한 탐구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폭력 앞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등장한다. 어머니는 삶의 원천이자 마지막 출구이기도 하다.
김기덕은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는 과정 속에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짐승처럼 잔혹하고, 무자비했던 강도라는 인물은 어머니를 얻게 되자 인간성도 얻는다. 그가 얻는 인간성은 후천적이기에 감독은 이를 일컬어 사죄라고 말한다. 결국, 구원이란 ‘자비’를 베푸는 어떤 대상, 말하자면 어머니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피에타>는 금속 공장의 기계성과 어머니가 손에서 놓지 않는 따뜻한 털실의 이미지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 속에서 자본의 기계성과 인간의 체온이 녹아든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에 흡수된 세계의 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은닉해 둔 폐부이기도 하다. 지금껏 냉혹한 자상의 이미지를 추구했던 김기덕 감독은 인간적 회복으로서의 사죄를 이야기한다. 주로 자기 구원의 세계에 집중했던 김기덕이 구원의 외연을 좀 더 확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삶을 침범한 어머니의 이미지는 조민수를 통해 훨씬 더 비밀스러운 힘을 갖는다. 조민수는 중년의 여성 연기자가 눈물을 통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 지 확인시켜 준다. 그녀의 통렬한 오열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대속하고자 하는 유일한 구원으로서의 어머니, 그 자체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사회적 메시지와 작가 고유의 주제, 거기에 종교적 화해의식까지 녹여낸 김기덕 감독의 노련한 걸작이다. 베니스로부터 온 황금사자상은 김기덕이 견지해 온 일관적 주제의식, 그것에 대한 세계 영화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