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문학과 군산

고은이 『1950년대』 서문에서 고백하는 절망과 폐허는 자신의 삶에 깊이 스며든 아픔과 고독을 현실의 언어로 교직하여 노래하게끔 만들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 녹아있는, 굵직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나 여리디 여린 목소리의 시원은 자신이 고백했던 절망과 폐허의 산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고은의 잠재의식에 견고한 성채를 이루는 1950년대에 대한 수사와 더불어 “아아! 1950년대”라고 영탄해야 했던 현실의 한 복판에 고향인 군산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고은(본명:고은태)은 1933년 현재의 군산시 미룡동(당시의 행정구역은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출생했다.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출간한 이후 반세기에 걸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의 시작 활동은 작품 목록을 작성하는 것만으로 벅차고 기가 죽는다. 김수영을 일컬어 ‘뜯어먹기 좋은 빵’이라면 고은의 문학세계는 광활한 대지에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한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이 글은 고은 시 전체를 대상으로 그의 시세계를 이루는 근간을 밝히는 류의 거창한 시도가 아니다. 필자의 능력 밖이다. 고은이 발산하는 삶의 상처와 울분 혹은 문학적 열정과 신념 그리고 예술가적 광기가 한국근현대사의 정곡을 꿰뚫고 날아가는 화살이 되어 날아갈 때 그 출발지 혹은 근간이 고향인 군산으로부터 분출하는 궤적일 수 있다는 가정에서 이 글이 놓여질 것이다.

“군산을 살짝 들추면 아픈 현대사가 보인다”는 지적은 『부끄러운 문화답사기-일제잔재편』과 『부끄러운 미군문화 답사기』의 경우 공히 해방전과 후를 관통하며 등장하는 군산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일제의 침략과 통치, 그리고 수탈을 상징하는 식민 권력기구의 잔재들을 중심으로, 그것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추적하고 있다면 일제잔재 청산조차 이루지 못한 마당에 또 다시 미군잔재 청산이란 업보에 가위눌린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 후자이다. 군산은 전자와 후자를 관통하며 공유한다. 일제 강점 36년과 주한 미군 주둔 6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군산은 한국근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식민지 시대와 식민지 시대 이후의 문화적 혼종 상태를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해방전 군산을 이야기할 때, 미두장의 속물적 자본주의를 탁월한 인간군상의 제문제로 풀어낸 채만식의 『탁류』가 식민지 근대성과 결탁한 제국주의적 속내를 비춰준다면, 고은의 『만인보』는 그러한 시대와 삶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군산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가난과 민중이라는 화두로 풀어낸 작품이다. 김남주는 「전군가도」에서, “이 길이 끝나는 곳은 군산항구라 한다/ 아 나는 오갈 데 없는 글쟁인가 군산이라 항구라 하니까/ 채만식의 탁류가 먼저 내 의식의 강을 휘젓고 미두(米豆)가 떠오르고/ 만인보의 시인 고은의 숨소리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군산을 떠올리면 먼저 채만식과 고은을 가슴에 새겨야 했던 이유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군산의 문제가 당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담아내는 민족 전체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의 ‘초봉’과 고은의 ‘만순이’가 눈물바람 날리며 떠났던 ‘전군가도’ 위에 여전히 또 다른 그와 그녀들이 존재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을 억압과 수탈의 길이라 명명할 때 그것은 벚꽃잔치의 벚꽃 속에 감추어져 있다.

『만인보』의 초기 시편은 군산의 시공간을 중심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내 이름은 다까바야시도라노스께였다”(「자화상」)에서 나타나듯, 식민지 시절 군산의 풍경은 일종의 명제화된 식민질서 하에서 자신의 삶과 질서를 내면화시켜야만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식민시절 일장기 날리며 정신대로 가서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한 ‘만순이’(「만순이」)와 유난히도 꽃을 좋아했던 ‘채순이’가 결국 아메리카 타운의 양공주되어 꽃 수놓은 옷 실컷 입었다(「채순이」)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전군도로의 벚꽃 속에 감추어져 있던 ‘수탈의 역사’와 ‘오욕의 뿌리’는 해방기 친일청산의 실패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이종남」과 「지서장 김충호」에 형상화된 그들의 공통점은 일제 때 ‘주재소 끄나풀’과 ‘일본 순사보’를 지냈던 존재이다. 또한 그들은 「자화상」에서 그려냈던 “일본놈보다 더한/ 우리 동네 천석군 지주”와 별반 다름이 없다. 식민지 토착부르조아와 일제 식민권력의 담합은 이종남과 김충호류의 친일군상을 생산하게 되는 바, 일본사람보다 더한 조선사람이 그들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지금까지 유예된 친일청산의 문제가 그들의 행적과 관련이 있다.

반민특위의 좌절과 더불어 면죄부를 받았던 그들은 “해방 뒤 그 사람 먼저 벌받아야” 했지만 잠시 숨어있다 나왔더니 세상은 일본군대에서 미국군대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아니 더욱 더 강고한 “권세”가 주어져 있었다. 일제시대 자신이 행했던 반민족행위는 감투가 되어 “길을 비켜라 하고 으시대었”고 “일제때 벼슬아치 구실아치”였던 “일본 순사보”가 지서장으로 승진발령되는 현실의 부조리함, 그것은 “김충호한테 맞아 병신 된 회현사람”을 통해 불구화된 민족정기 혹은 왜곡되고 삐뚤어진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하는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조기는 어디서나 내 불가피한 치욕의 사물이었습니다”(「성조기」)는 시적 화자의 내면화된 독백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일장기와 태극기 혹은 성조기와 태극기의 관계는 태극기와 관계하는 두 국가의 모든 분야에 걸쳐 상관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내밀하게 고백하는 “치욕의 사물”이란 성조기에 대한 사유는 일장기와 보릿고개 시절을 감내해야 했던 또는 식민지로부터 해방의 의미와 견주어졌던 “자유세계”라는 상징과 겹치면서 증폭되는 배신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겨우 내가 일본 군가라도 一節 부를 수 있을 때/ 八軍이 왔습니다. 八軍이 왔습니다.//그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자라났습니다./그러나 八軍 마아크가 달린 가슴으로 나는 노래부를 수 없었”(「슬픈 씨를 뿌리면서」)던 이유였고, “몇 십 년 동안/K-8 최신예 전투기들이/내 고향의 하늘을 차지했”(「진천장에서」)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뀌는 현실은 “성조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일장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권평건」) 내밀하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는 혼종의 시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일제의 잔재와 미국의 미군문화로 뒤섞인 군산의 거리가 일본적이기도 미국적이기도 한 이유를 구할 수 있으며, 이는 군산만의 문제가 아닌 남한 전체의 문화적 식민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살풍경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머슴 대길이」와 「선제리 아낙네들」을 읽어보자.

시인의 고향, 군산. 그 속의 출생지 용둔리와 새터말을 감싸 안은 미룡동은 지금 신시가지처럼 휘황하다. 시인의 모교인 미룡초교와 군산대학교 앞을 질주하는 도로가 비오면 질척거리던 옛 오솔길을 메워 선제리쪽으로 시원스레 뻗어 있다. 그 옛길 위에 선제리 아낙네들이 걷고 있다. 머슴 대길이가 어린 고은의 눈을 바라 본다. 대추알 만한 별들이 방금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아 무서웠다는 군산의 밤하늘, 배고파 그 별을 따먹고 싶었던 시인의 가난했던 유년기, 그 시절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견딜 수 있었던, 선제리 쪽으로 향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노래는 늘 아름답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