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에서 미래를 찾다
인생의 지혜보다 생활의 지식을 찾아다니는 데에 급급한 우리들에게 진정 고전은 쓸모없는 것인가? 대부분 머리로는 그렇지 않다며 고전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몸소 고전 읽기를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버스나 지하철 안의 풍경을 보더라도, 손안에 쏙 들어오는 스마트폰 대신에 두툼한 고전을 펼쳐 들고 있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 확 달라진 세태에 당혹함을 느끼면서도, 그 ‘경건한’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주머니 안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슬며시 흘러나오는 쓴웃음과 끝모를 암담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리라.
지금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혜택을 만끽하는 ‘고객’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현실을 헤쳐나가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포기한다면, 오늘의 달콤한 열매는 머지 않아 신기루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은 무엇보다도 고전을 읽지 않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를 도외시한 채 현실에 매몰되어서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古典)은 말 그대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쌓인 경륜과 성찰의 집적물이다. 마을 어귀에 우뚝 자리잡아 수호신 역할을 해온 고목처럼, 고전은 당당히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 오늘의 우리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존재이다. 그 고목이 여행하는 이들에게 이정표 구실을 하듯이, 고전은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의 가치에 대해 흔히들 옛것을 익혀서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옛것에만 집착해서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고 맹신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18세기 실학자 박지원이 지적한 것처럼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이다.
고전이라고 해서 절대 불변의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전은 경전(經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와 신념을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경전이 아닌, 고전이 오늘날에도 고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바로 시대에 따른 재해석의 여지를 온축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또한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며 내일은 오늘의 반복이라 한다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쉽사리 고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세찬 물결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 않은가?
고전이 단순히 옛것이라 해서 고서(古書)로 치부되지 않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과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지, 옷의 찌든 때를 말끔히 지우고 막힌 변기를 요령있게 뚫어내는 생활의 지식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의 지식으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서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좀 더 편안하게 한평생 살아가리라 마음 먹는다면 고전은 필요없을 수도 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보리라 생각한다면, 고전은 아주 훌륭한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고전을 친숙한 벗으로 사귈 수 있으며, 고전을 어떻게 재해석하여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고전과 친숙한 벗이 되기 위해서는, 고전을 항상 펼쳐놓고 들여다 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함께 어울려 다니지 않고서야 어떻게 벗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고전이라면 난해한다는 편견을 떨쳐버리고 지금 당장 고전 책 한 권을 손에 들고서 펼쳐보는 것이 고전의 친숙한 벗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자신의 수준과 관심에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고전을 선택해서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한번 읽어보라. 고전의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에 흠뻑 젖어본다면, 세상을 덮어버릴 원대한 포부와 인생을 바라보는 깊은 안목이 절로 생겨날 것이다. 우리 대학에서 최근에 고전을 읽는 강좌를 개설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고전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고인과 함께 친숙한 벗이 되어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정된 인생의 시간을 무한하게 즐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수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혹독한 검증을 받아 오늘날에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데에서 보듯이 고전은 그 자체로서 무한한 사고의 깊이와 광대한 경험의 폭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을 쉽사리 정복하리라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야말로 가까이하기에는 먼 당신일 수 있으며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버거운 존재일 수 있다.
어릴 때 누구나 경험했을 자전거 타기를 떠올려 보자. 처음으로 자전거 타기에 도전할 때 온몸은 흙투성이가 되고 뼈 마디마디가 온통 저려온다.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해 한발도 내딛지 못하고 거꾸러지기 일쑤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면 자전거 타기의 묘미를 체득할 수가 있다. 단순히 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읽기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 드디어 자전거 타기가 몸에 익숙해져 체득의 경지에 이른다면, 온갖 묘기를 부리며 자전거를 마치 자기 몸의 일부인냥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고전은 단순히 습득(習得)할 대상이 아니라 내 몸안으로 기껏이 받아들여 체득(體得)해야 하는 존재이다.
고전은 한번 읽고 버릴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들춰볼 적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와 닿는 존재이다. 자전거 타기를 다 배웠다고 자전거를 내팽개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고전은 친숙한 벗으로 굴곡진 인생에서 나를 다독여주기도 하고 일침을 놓아 정신을 번쩍 들게도 하는 것이다. 10대의 열정으로 탐독했던 고전 한 권이 40대 중년의 나이에는 새로운 맛과 멋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고전 속의 고인은 화석처럼 옛 모습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 숨쉬고 온기를 내뿜으며 나에게 손짓하는 불사신(不死身)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손을 뻗으면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아줄 것이다. 다만 내가 손을 뻗을 용기만 있다면 말이다.
고전의 가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인생의 깊은 지혜와 통찰에 기반한 유연하면서도 독창적인 사고야말로 고전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 생각한다.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또한 평범함을 거부하고 남과 다른 개성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독창적 사고가 필요하다. 유연하면서도 독창적인 사고는 바로 법고창신의 핵심이며, 우리가 고전에서 미래를 찾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유연하고 독창적 사고를 지닌 이들이 주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래의 세상에서 단순히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길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고전에서 찾아야 하리라. 그러므로 고전을 알지 못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느니 차라리 고전에 저돌적으로 덤벼들어 보는 게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