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외국인 거류지의 흔적, 원도심의 격자형 가로망
근대 개항도시로서 군산의 가장 오래된 흔적은 아마 원도심의 격자형 도로 체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제국 정부가 군산을 개항하면서 외국인 거류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계획한 사각형의 도시 블록과 그것을 둘러싸는 격자형 가로망에서 현재 군산 원도심의 도로 체계가 유래하기 때문이다. 격자형 가로망의 안쪽으로 도시 블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축물들은 대한제국기로부터 현재까지 수없이 고쳐지어지고, 새로 지어지며 그 모습을 달리해왔지만, 원도심에 형성된 격자형 가로망과 도시 블록은 여전히 개항기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시를 바둑판과 같은 격자형의 가로망으로 계획하는 방법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여 왔던 도시계획 기법 중 하나이다. 서양에서는 터키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 밀레투스의 유적에서 그 초기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밀레투스를 계획했던 고대 그리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였던 히포다무스는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도시계획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도 이미 주나라 시대에 여러 개의 남북 도로와 동서 도로로 도시를 구획하여 왕성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역사상의 여러 중국 왕조의 수도에서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도시 구성의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의 가장 바깥쪽 외성과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격자형 가로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라북도에서도 통일신라시대 9주 5소경의 하나였던 전주(완산주)나 남원(남원경)에서 그러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배경은 다르지만 도시를 격자형 가로망으로 계획하는 기법은 인류 역사에서 낯설지 않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산의 경우에는 외국인 거류지를 조성하기 위해 격자형 가로망이 도입되었다. 도시 블록을 소규모 단위 필지로 분할하여 쉽게 외국인에게 불하하기 위한, 즉 상업적 토지 거래의 편의를 위해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도시 구성을 도입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작성된 지도를 보면 당시 군산에 조성된 외국인 거류지의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불하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국가에 한정된 거류지인 ‘전관조계’와 달리 군산은 서양인을 포함한 여러 나라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토지 불하가 가능한 ‘각국조계’였다. 그러나 거류지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불하받으면서 군산은 일본의 전관조계와 다름없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군산의 상황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군산보다 2년 앞서 개항했던 목포에서도 격자형 가로망에 의한 도시 계획 방법이 적용되었고, 각국거류지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외국인 거류지의 토지를 불하하면서 조성된 자금으로 도로 포장이나 상하수도 시설과 같은 도시 기반시설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근대적인 도시 기반시설을 갖춘 군산의 형성은 외국인 거류지의 조성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결국 외국인 거류지는 일본인들의 생활 중심지가 되어갔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식민지배의 중심적인 공간이 되어갔다. 이미 대한제국이 외국인 거류지를 조성하면서부터 이곳은 한국인이 살기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곳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들은 그 바깥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거주지에서 밀려난 한국인들의 거주지는 지금의 개복동과 둔율동 등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채만식의 ‘탁류’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한국인 거주지가 형성된 이곳을 ‘콩나물 시루’라고 묘사한 것처럼 이곳은 근대적 도시 기반시설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식민 사회의 차별성이 현실화된 공간이었다. 처음 외국인 거류지 조성을 계획했던 대한제국 정부도 원래 거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본제국주의 역시 이곳을 기반시설을 갖춘 도시로 조성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근대도시 군산에는 격자형 가로망과 콩나물 시루의 극명한 대조가 공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