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공설시장과 대야 주조장, 철도와의 또 다른 관련성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 나라와 지역의 서민 문화 또는 고유한 일상생활 모습을 보거나, 삶의 일부분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재래시장을 방문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과 같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근대적 상업공간이 생겨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재래시장에서는 그 지역에서 오랜 세월동안 반복되어온 일상생활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이유에서 재래시장이 때로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기도 한다. 군산에는 어떤 재래시장이 남아있을까?

군산에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재래시장은 약 10여 곳 정도이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신영동에 위치한 군산공설시장이다. 그리고 군산공설시장에서 북쪽으로는 신영시장이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역전종합시장이 연속되어 구 군산역으로부터 철길을 따라 그 주변지역에 재래시장이 빼곡하게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 새로 건물을 지어 문을 연 군산공설시장은 군산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으로 1931년 현재의 위치에 ‘군산부영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 지어졌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60년대 말 다시 건물을 지었다가 노후화되어, 지난해 새로 건물을 짓게 된 것이다.

군산부영시장이 처음 만들어지게 된 것도 군산선 철도와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1912년 군산선 철도가 개통된 후, 그 주변으로 5일장이 서고 노점상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고, 1918년 장재동에 한국인 시장이 설치되었다. 새로 생긴 군산역으로 인해 유동인구가 증가하고, 인근에 한국인 거주 지역이 가까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29년 군산부는 장재동의 군산시장을 포함하여 당시 흩어져 있던 상가를 한데 모아 신영동으로 이전하여 군산부영시장을 만들게 된다.

군산공설시장과 그 주변의 상업지역이 군산의 근대기에 형성된 곳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온전하게 남아있는 당시 건축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군산공설시장이나 주변 재래시장에 속한 상업건축물은 아니지만, 당시에 지어졌던 일식주택 한 동이 평화동 시장 안쪽에 남아있다. 군산공설시장에서 길 건너 안쪽 블록에 있는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이름 있는 유력자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4년 지도에 집주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담장과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도로에서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규모의 목조 2층 일식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독특한 점은 일본식 주택에 평지붕의 서양식 응접실이 덧붙여져 있다는 점이다. 건물 외부에서 응접실로 직접 연결되는 출입구를 별도로 두었는데 출입구에는 평지붕의 캐노피를 설치하고 있다. 해방이후 이 건물을 특무대에서 사용했다고도 전하며, 이후 응접실 부분을 병원으로 사용했었다고도 한다. 때문에 응접실 부분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있었던 것인지, 추후 덧붙여진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양식 주택 형식이 가미된 일식 주택으로서의 독특한 모습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철도의 개설이 군산공설시장의 형성과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철도는 군산에서의 쌀 가공 산업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 철도를 따라 주변지역의 쌀이 모아지면서 군산에서는 쌀 가공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가장 일차적인 쌀 가공 산업은 정미업이었다. 군산역에서 군산항으로 이어지는 철도 주변으로 많은 대규모의 정미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미소가 남아있지는 않다. 정미업과 마찬가지로 술을 만드는 양조업 역시 쌀 가공 산업 중 하나였다. 군산에서 당시의 양조업과 관련된 건축물이 대야에 있는 대야합동주조장 건물이다. 이 건물은 관리 대장에 1937년에 지어진 건축물로 기록되어 있다.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로 1층은 주조 공장이고, 2층은 공장 및 창고, 사무실 용도로 지어졌다. 공장 건물이었기 때문에 건축물 자체가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기 군산에서 발전했던 쌀 가공 산업의 단편을 보여주는 건축 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