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한 닭백숙

겸허한 닭백숙
                                                                           정철훈

솥단지를 들여다본다
거기 웅크린 채 젖어 있는 닭 한 마리
자신이 자신을 얼마나 껴안아야
이토록 하얗게 발가벗은 닭이 될까

그때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다는 건 하나의 경이다
심각한 언어장애를 앓으며 살아왔다는 내 전생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
게다가 닭살이 돋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전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감으로 소름이 돋아 있는
저 모양새가 과연 우리 살아 잇는 밀도란 말인가
평생을 두 발로 걸어왔을 하나의 생애가
국물에 푹 젖어 있다

벼슬도 대가리도 제거된 채
살아 있을 때 세상과 접촉했던 모든 기관은 없어지고
죽은 몸이 죽은 몸을 힘껏 껴안고 있는
이 장렬한 생애를 우리는 닭백숙이라고 부른다

머리쪽도 다리쪽도 방위가 없다
아무 방향도 없이 누워 있는
이 하얀 물체를 나는 백색의 공포라고 명명한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이 공포를 얻기 위해서다
궁극은 아니지만 궁극에 가까운 삶의 포즈

지금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솥단지 속 닭백숙의 자세가
또 하나의 겸허다
겸허한 반성이자 겸허한 완성이다
닭백숙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날씨가 더워지면 생각나는 보양식 중의 하나가 닭백숙이지요. 발가벗은 닭, 그러니까 솥단지 속 닭백숙의 자세는, 측은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다소 민망한 느낌도 없지 않지요. 벼슬도 대가리도 제거되어 세상과 접촉했던 모든 기관이 없어진 채, 두 다리를 모아 그야말로 “죽은 몸이 죽은 몸을 힘껏 껴안고 있는”, 발가벗은 자세의 닭백숙. 평범한 일상의 대상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처럼 문득 새롭고 낯설어집니다.
닭백숙은 그저 닭의 생애로 그치는 게 아니라, 때로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게도 한답니다. 화자가 닭백숙에서 돌연 ‘겸허’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이처럼 엉뚱한 데서 충격적으로 얻어지기도 하는가 봅니다. 그것은 ‘백색의 공포’라고 명명되는데, 이는 일찍이 시인 기형도가 노래했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빈집?)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화자는 닭백숙의 자세에서 “겸허한 반성이자 겸허한 완성”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껴안고 있는, 혹은 죽은 몸이 죽은 몸을 껴안고 있는 닭백숙의 자세는, “궁극은 아니지만 궁극에 가까운 삶의 포즈”라네요. 닭백숙을 통해 “전신이 자기 자신의 존재감으로 소름이 돋는”, 그야말로 “닭살이 돋는” 경이의 순간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극적인 방향 전환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돌연하게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닭백숙도 겸허하지만 그런 닭백숙에서 삶의 방향을 성찰하는 태도 역시 겸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