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반포 1000년 도래를 기원하며
바야흐로 한글날이다. 특별히 올해는 한글 반포 57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글과 한국어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매년 한글날이 되면 국민들의 바른 국어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여러 행사들이 열리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또 국어사용 실태를 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국어사용이 아닌 어휘력에 한정하여 논의한 것은 그리 많지 않기에 짧은 지면을 빌려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 청소년의 어휘력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언론사에서 기사교정을 보는 일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 교정을 보다보면 기사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기사에 더 적합한 어휘를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떤 어휘가 더 적합할까 항상 고민을 한다. 적합한 어휘가 나오지 않으면 자신의 어휘 수준에 대해 반성을 하는데, 이는 교정기자 뿐만 아니라 모든 기자들의 고민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필자가 속해있는 편집교정팀의 팀원들과 함께 현대인, 특별히 대학생들의 어휘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인터넷과 SNS 등의 발달로 일상생활에서 인터넷 용어와 은어 등을 사용하는 빈도가 현저히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는 인터넷 용어와 은어, 비속어 등의 발달도 언어가 변화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에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확실히 인터넷 용어와 은어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의 대다수를 차지하다보면 어휘력 자체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렇다면 ‘어휘력’이란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어휘력은 ‘어휘를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이다. 즉, 단순히 어떤 어휘를 지식 차원에서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미를 이해하여 읽고 쓰고 말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어휘력이 부족하면 공부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빈어증(貧語症)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빈어증’이 심각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국어시간이 아닌 영어시간, 과학시간에도 교과서에 제시된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본질적’, ‘상쇄’, ‘그을음’ 등의 뜻을 몰라 영어 단어를 해석하거나 과학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어휘력을 다져놓지 않는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도 글을 이해하는 문해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OECD에서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성인 문해력이 최저수준인 사람의 비율이 38%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20개 나라 중 19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 OECD 국제 성인 문해력 조사결과/출처: EBS 뉴스 |
그렇다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어휘력이 부족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독서량의 부족이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연평균 독서량은 9.2권이라고 한다. 한 달에 채 한 권도 읽지 않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우는 그래도 성인보다 낫다. 연평균 24.3권으로 한 달에 두 권의 책은 읽으니 말이다. 그러나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하면 꼴지 수준이다. 어휘력은 새로운 어휘를 많이 접해야 상승한다. 그리고 새로운 어휘를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독서이다. 인터넷과 SNS에서 비슷한 어휘들만 접한다면 결코 어휘력이 상승할 수 없을 것이다.
▲ 연령별 연 평균 독서량/출처: 매일경제 |
둘째, 한자 교육의 부재이다. 국어의 70%가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고, 고등학교 교과서의 한자어는 무려 90%라고 한다. 그럼에도 한자 교육을 하지 않으니 단어를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2015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 병기를 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 올해 말까지로 결정이 유보된 상태이다. 개인적으로는 학업 부담이 일부 늘어나더라도 한자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교육을 받을수록 한자어가 많아지는데, 한자를 모르면 단어의 직관적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경우 따로 단어를 찾아 이해해야 하는 데 결국 추가 학습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리 한자 교육을 받는 편이 오히려 학업 부담이 줄어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영상매체의 발달이다. 활자 매체와 달리 영상 매체는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정보를 인식한다. 그리고 보여지는 정보는 새로운 어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스스로의 언어로 영상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다 보니 정보는 전달받지만 새로운 어휘는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상 매체를 방송하는 방송에서의 국어 파괴이다. 각종 예능에서는 자막 등을 통해 은어와 비속어를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드라마에서도 가벼운 욕설은 감추지 않고 방송한다. 미디어 매체의 파급력을 생각할 때, 방송 매체의 국어사용에 있어 확실히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을 늘리고 바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인간의 사고와 언어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고의 결과를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가 확장되기도, 제한되기도 한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인재상인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요소들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어휘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위인들이 독서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휘가 우리의 사고를 한정하지 않도록 개개인의 어휘력을 증진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관련 연구의 활성화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어휘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휘별 빈도수와 난이도를 분류해야 한다. 분류한 난이도에 따라 맞춤형 어휘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어사전을 보면 단어의 빈도수를 별표(*)로 표시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국어사전에는 단어의 빈도수에 대한 표시가 전혀 없다. 영어교과에는 존재하는 학년별 필수 어휘도 국어교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휘의 빈도수와 난이도를 분류하는 작업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수준에서 진행하기엔 무리가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연구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국가에서 이에 대해 특별히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독서를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로 인식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선택적 차원에서 독서를 본다면 여러 바쁜 일과에 밀려 독서할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하는 저축과 같이 필수적인 과정으로 독서를 바라본다면 독서할 시간을 내는 것이 아깝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또 방송과 인터넷 상의 언어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무분별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으로 더 나은 어휘를 사용하고 더 나은 언어를 구사하려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세계화로 인해 사라지는 언어, 즉 ‘사어(死語)’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필자는 언젠가 한국어마저 ‘사어’가 될 것 같아 우려된다. 한국어가 ‘사어’가 된다면 한글도 문자로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말에 맞는 문자를 만들고자 창제된 것이 한글인데, 우리말이 사라져 버린다면 문자로만 기록되는 한글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한글 반포 570주년을 기념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한글 반포 1000년의 도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올바른 국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 광화문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출처: 놀이미디어 오펀 |
▲ 참고: <주간조선> 2404호 2016년 4월 25일자 기사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404100001&ctcd=C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