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민족주의 - 한스 울리히 벨러
‘웃음이 사라진 공주 이야기’를 패러디한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이 만화에서도 처음에는 역시 부마가 되고자 패기 있게 왔으나 결국 공주를 웃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하나씩 처형된다. 그러다 마지막 등장한 젊은이의 말에 참석한 모두는 소위 ‘빵 터진다.’
“저기.... 일본 사람들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래요.”
실제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민족 개념은 다양하게 펼쳐져왔다. 민주화 운동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던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는 전통 수호를 내세운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와 정부의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사회 변혁 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가 양립하고 있었다. 대립적인 두 세력이 서로 다른 민족주의를 지향할 때, 그 안에 담긴 민족의 개념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자가 정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통합과 반공주의를 민족으로 주장할 때, 후자는 자유민주주의와 통일을 민족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민족주의에 따라서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작가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다시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의 진정한 의미가 단순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 존재의 근거를 확인하고, 역사적 자부심을 교육하고자 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처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회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미래 사회의 민족은 얼마든지 다시금 규정될 수 있다. 서로 다른 차이를 경계로 타민족을 배제하고 차별화 시키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한 정치공동체 안에서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기존의 민족주의적 시선이 피부색에 따라, 경제적 계층에 따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우리와 남을 구분해내는 데에 사용되었다면, 새로운 민족주의는 혈연이라는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기원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는 데에 사용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문화’, ‘다양성’이라는 말은 텅 빈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결국 민족과 민족주의는 공존과 연대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이름으로 붙게 될 때만이 가장 가치 있게 작동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어쨌든, 민족과 민족주의가 더욱 유연해져야 할 것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