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소중함을 잃는다는 것, 지나간 과거를 잊는다는 것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사람들에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종종 보이는 이 구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에 나온 구절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익숙함’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익숙함을 통해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편안함에 점차 소중함과 가치를 잊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익숙함의 양면성은 작게는 물건으로, 크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적용된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새로운 것에 설렘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에 흥미로움을 느낀다. 당연한 현상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은 나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모르던 분야를 알아가는 것만큼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질린다.’,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들도 이전에는 새로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익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고, 더 이상 알아갈 것이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착각이라면 어떨까? 더 알아갈 수 있고, 사실은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더 많은데 내가 다 안다는 착각으로 더 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정말 ‘익숙함에 속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익숙함에 속아버린 대부분 사람은 그것에 담겨있는 과거를 함께 잊기 시작한다. 익숙해지기 전,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 그것을 더 알아가기 위해 해왔던 노력이 담긴 과거를 말이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해온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또 앞으로 나아간다. 점차 쌓여간 경험들이 나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잘못된 일을 반복하지 않게 되고, 또 경험을 통해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가면서 더 괜찮은 사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경험 즉, 과거를 잊는다면? 다시금 잘못된 일을 반복하고, 같은 상황이 다시 닥치더라도 대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실수의 반복은 과거에 내가 해오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익숙함에 속아 잃게 된 ‘소중함’은 나를 더 성장시킬 수 있었던 기회를,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해왔던 노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잊는 것은, ‘나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더욱 빨리 잊게 된다. 우리가 땅 위에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직접 씨앗을 심고, 가꾸며 공을 들여 농사를 짓는다면, 우리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 얻게 된 결실에 집중할 것이다. 그 결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이 땅이 없었다면, 내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조차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이 단단한 지반이 될 수 있도록 땅을 갈고, 영양을 공급했을 지난날의 누군가가 해왔던 긴 시간의 노력은 잘 생각하지 않고, 알게되어도 현실에 집중해 과거의 노력을 잊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기반이 되어준 과거의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더 나은 환경 속에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과거를 잊게 된다면, 모래성 위에 쌓은 성처럼 그동안의 노력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새롭고 빛나는 것에 치중하면서 과거를 잊는 것은, 다시금 아픈 경험을 반복해야 하는 아픔의 굴레에 빠지는 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