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애인’이라는 말, 어떤 느낌을 받으시는지요. 약간 장난기가 섞여 경망스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십니까. 또 혹시는 남녀간의 부적절한 관계를 떠올리지는 않으십니까.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한없이 가벼운 요즘의 세태 속에서는 애인이라는 말도 그리 사무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제목부터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이며, 사랑도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랍니다. 그리고 그대는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이라네요. 그래서 이 세상의 애인이란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라는 단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념과 한탄의 어조는 결국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강력한 부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강력한 부정은, 부정 그 자체에 힘이 실려 있다기보다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사랑에 실패했을 때, 때로 사랑 자체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그 결말의 씁쓸함에 대해 다소나마 위안 받고 싶어들 하니까요. 누구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어떤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이 작품의 강력한 부정은 이러한 역설적 사무침을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작품에 ?옛애인에게 돌아가지 마세요?라는 시가 있는데요. 그 작품은, 현재의 애인을 떠나 옛애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충고하며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과 박정대 시인의 이 시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박정대 시인이 그 러시아 시인의 작품에서 어떤 시적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상호텍스트성이라고 하지요.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어요”라는 구절과,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라는 구절 사이에는 어떤 감정의 미묘한 편차가 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앞의 표현이 옛사랑에 대한 미련의 부질없음을 말하고 있다면, 뒤의 표현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누가 더 현명하고 건강한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 세상의 모든 애인은 결국 옛애인이자 없는 애인인도 모릅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은 애인과 어떠십니까. 그저 가볍게 만나 사랑하다가 쿨하게 끝낼 수 있는 관계인지요. 아니면 이 작품에서처럼 사무치는 절실함이 있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