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춘 가옥과 군산시 외곽의 일본인 농장 유산

근대기 군산은 군산선 철도의 육상교통이 군산항의 뜬다리 부두를 통해 해상교통으로 이어지는 물류의 거점으로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상업 및 금융시설과 그 주변으로 형성된 주거지역이 도심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심 외곽으로 형성된 대규모의 농장 지역이 도심을 둘러싸는 공간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운영되었던 여러 일본인 농장 중 규모가 가장 큰 농장이 현재의 군산간호대학교 일대에 자리하고 있던 구마모토 농장이었다.
구마모토 농장을 경영했던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1903년 한국에 온 후 군산의 넓은 농토와 만경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보고, 대규모 농장 개설을 위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 이미 1,50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논만 3,000정보 이상 소유하였던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구마모토 농장은 개정을 중심으로 옥구, 미면, 정읍, 화호 등에 걸쳐 있었고, 농장에 소속된 소작인만 3천 세대 2만 여명에 달했다. 넓은 농지와 소작농을 관리하기 위해 구마모토 농장에는 경리부, 사업부, 진료부와 같은 별도의 관리 부서를 두었고 관리 직원만 49명이 고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근대적인 경영, 관리기법 등을 통해 구마모토 농장은 농업 생산과 수탈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구마모토가 농장을 방문할 때 거처로 이용하여 별장과 같은 구실을 하였던 주택이 현재 군산간호대학교 내에 남아 있는 이영춘 가옥이다. 이 주택에 이영춘 박사의 이름이 붙게 된 것은 해방 후 이영춘 박사가 이 주택에 거주하였고, 지난 2000년 이 주택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00호로 지정되면서 그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영춘 박사는 평남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일본 교토대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구마모토 농장의 진료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군산과 인연을 맺었고, 해방 후에도 지역의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이영춘 가옥은 근대기 군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근대 건축 유산이다. 당시 일본인 농장에 지어졌던 수많은 창고와 주택 등의 건축물은 대부분 현존하지 않는다. 반면, 이영춘 가옥은 부분적인 변형은 있으나 건립 당시의 전체적인 외관과 공간 구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영춘 가옥이 현재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건축물이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의 별장 보다는 이영춘 가옥으로 기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일본식 주택과 구별되는 외관과 건축 수법 등도 기여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 건축물은 프랑스인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한 근거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영춘 가옥 외에도 일본인 농장과 관련된 몇몇 주택 건축물이 현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북교차로로 이어지는 대로변 우측의 당북리에도 일본인 농장의 부속 건물이었던 일본식 주택이 남아 있다. 목조 2층 건물로 일반적인 주택과는 달리 사무소 용도의 공간이 주택과 결합되어 있는 형식의 건물이다. 넓은 앞마당을 포함하여 주변에는 농장에 소속된 여러 채의 부속 가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택 전면으로 사무실이 돌출되어 있고 사무실 뒤쪽으로 온돌방과 부엌, 사무실 우측으로 방이 있는 형태이다.
산북동에 있는 불이농촌주택도 그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일본인 농장과 관련된 건축 유산이다. 이 주택들은 불이흥업주식회사의 집단 농장에 지어졌던 주택이다. 불이흥업주식회사는 1920년대 초 군산시 옥서면과 미성동의 갯벌 지역에 간척사업을 벌여 총 1,850정보의 농지를 조성하였다. 간척사업을 통해 조성된 농지 중 남쪽의 850정보는 한국인이 소작하도록 하였고 북쪽의 1,000정보는 일본인을 이주시켜 경작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인 1,700여명이 이곳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이농촌주택은 이영춘 가옥과 같은 건축물에 비해서는 건축 자체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지만, 이영춘 가옥이나 당북리 일본식 주택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농업 수탈이 심했던 군산 지역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