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판매기

자동판매기
                                                                                      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거리 곳곳에 혹은 건물 구석마다 어김없이 죽치고 들어앉은 기계장치가 있지요. 자동판매기를 통해 우리는 각종 음료와 먹을거리에서부터 간단한 일상 용품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품목들을 구매하곤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소비사회에서 자동판매기를 거치지 않은 매매는 오히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자동판매기는 어쩌면 이 작품에서처럼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기도 하고 “신의 오렌지 주스”를 줄 수도 있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돈만 넣으면” 말이지요. 그래서 자동판매기를 통한 매매 행위는 매매춘으로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종교적 구원마저도 돈의 권능으로 매매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 그리고 황금만능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돈을 지불하기만 하면 인간의 어떤 욕망이든 구매가 가능할 것이라는 태도는 확실히 비판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대해 아무런 회의도 반성도 없이 휩쓸려 살아가는 우리들의 습관화된 일상에 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그만 버튼을 잘못 눌러 커피를 마시게 된 상황에서, 작품 속의 화자는 새삼 습관의 무서움을 인식하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과연 물질문명이나 황금만능주의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무비판적이고 습관화된 의식이겠지요. 습관은 마치 최면술사처럼 우리를 몽유병자로 만들어 끌고 다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욕망을 구입하여,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오히려 거기 있는지조차 무감각해진 자동판매기를 소재로 하여, 이 작품은 자동화되고 습관화된 소비적 삶과 인간 소외의 현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는 의문이 있지요.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 숨어있는 포주에 의해 우리는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강연호(시인, 원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