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이승우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왔지만, 작가 이승우는 내게 소설쓰기를 가르쳐주신 스승이다. 그와 동시에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소설을 쓰는 선배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작가로서의 삶의 태도를 배우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우 작가의 소설들은 적어도 내게 소설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여러분께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러분 중 누군가는 내가 그랬듯 그의 소설에서 세상과 삶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 나로서도 굉장히 기쁜 일일 될 것이다.
사실, 이 작가의 전작들이 읽기 편한 작품은 아니었던 것만큼이나 오늘 소개할 ‘지상의 노래’ 역시 가벼운 읽을거리랄 수는 없다. 누군가는 단순하지 않은 문장들의 나열을 지루해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종교적인 이유로 다소 불편해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다소 밋밋한 이야기의 굴곡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그러한 문제들은 어느 순간 깨끗하게 사라지고, 드디어 이야기 속 내밀한 작가의 목소리와 대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극적인 음식들에게 길들여진 입맛일망정 우리들의 몸과 입을 정말로 즐겁게 하는 음식의 맛은 단백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 소개할 이승우 작가의 ‘지상의 노래’를 음식의 맛에 비유하라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9쪽)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천산수도원의 벽서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 소설은 바로 이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천산수도원은 짓밟혔고 수도원의 형제들은 내쫒기거나 산 채로 매장 당했다. 그러고 보면 ‘욕망’이란 참으로 위험천만하다. 그러나 천산수도원 그 자체도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고 누군들 확신할 수 있겠는가. ‘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고 보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점철하는 우연이란 결국 우리 자신의 욕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신과 나, 그와 그녀, 그밖에 수많은 그들 중 누구도 우연을 우연하지 않게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더위와 추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느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봄과 가을이 사라졌다고들 걱정해 왔지만 지난 여름의 유난히 길었던 더위와 이른 추위가 그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짧은 가을일망정 이미 충분히 깊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사색하라 권하고 싶다.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은 깊어진 가을만큼이나 짙어질 것이다. 어쩌면 짧은 이 계절이 다 가기 전, 여러분의 가슴 속에 다가올 계절의 추위를 가뿐히 견디게 할 뜨거운 불덩이 하나쯤 품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책읽기만으로도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부디 믿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