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어디까지 알고 있니?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전통적인 기념일이다. ‘탄생한 날’ 이라고 하지 않고 ‘기리는 날’이라고 적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탄생한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성탄절, X-MAS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이름으로 기독탄신일이라 규정하고 있다.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특별하다. 역사 속에 얽힌 여러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가지는 성탄절의 역사에 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성탄절을 최초로 기념한 것은 조선 말기 즈음이었다. 서재필 박사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1896년 12월 24일 자 신문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는 성탄절을 알리는 기사가 처음으로 실렸으며 이듬해인 1897년 12월 23일에는 ‘우리 신문도 그날은 출판 아니할 터이요. 이십팔 일에 다시 출판할 터이니 그리들 아시오.’라는 공고문이 실려 본격적인 성탄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훨씬 전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음력을 사용했기 그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에는 곤란했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기독교 계열 종교의 신자들이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가 심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종교가 정착되고 난 이후인 조선 말기에 독립신문에서 크리스마스를 휴무일로 지정하는 것으로 성탄절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개신교계 미션스쿨이었던 이화학당 역시 독립신문의 발표와 함께 수업하지 않고 방학에 들어가며 지금의 성탄절 문화를 정착시켰다.
|
▲ 1897년 12월 23일 독립신문 / 출처 : 독립신문 |
▲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한 이화학당 / 출처 : 중앙일보 |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크리스마스
성탄절 문화는 계속 이어져 왔지만,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잠시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1932년, 결핵의 예방과 계몽을 위해 도입된 크리스마스 씰이 최초로 발행되었지만 씰에 담긴 거북선 그림이 일제 치하에 저항정신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남대문으로 교체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40년도에 발행된 씰은 ‘산의 높이가 20m 이상이다,’ ‘씰에 서기연호가 사용되어있다.’ 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크리스마스 씰의 발행을 중단시켰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크리스마스 씰 발행자인 선교의사 셔우드 홀이 스파이 누명을 쓰고 일본 헌병대에게 강제로 추방되자 1932년부터 1940년까지 9차례 발행된 크리스마스 씰 또한 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종교적인 기념일이었던 성탄절의 문화는 점차 상업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신문에서는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갔다’라는 규탄을 받을 정도였다. 일본의 지배 아래 의미가 퇴색되어가던 크리스마스는 어느 날부터 먹고 마시는 행사가 금지되고 탄압당하기 시작했다. 이후 크리스마스는 기쁨 대신 자유를 잃어버린 우울한 날이 되어버렸다.
▲ 1930년대 명동의 연말 거리 / 출처 : KNNews |
▲ 1932년의 크리스마스씰 / 출처 : 네이버 |
▲ 거북선 크리스마스 씰 도안 / 출처 : 네이버 |
크리스마스는 ‘통금 없는 날’
1945년 독립 이후, 미군의 군 정치하에서 각종 관공서의 휴일로 지정되었고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에 따라 지금의 ‘기독탄생일’이라는 이름의 법정 공휴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됐다. 당시 발행된 신문에서는 성탄절 축하 파티에 대한 여러 광고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탄절은 독립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더욱 중요해졌는데, 1945년 9월 7일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야간통행금지는 처음엔 20시부터 5시까지였다가, 0시부터 4시까지로 정정되었고 나이 불문 전 연령층이 그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야간통행 금지령이 남아있던 1982년까지 약 36년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소위 ‘통금’없는 날이었던 성탄절은 일 년에 몇 번 없는 자유의 날이자 축제의 날이었다. 지금의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인식되는 것 또한 당시의 성탄절이 야간통행 금지령을 풀어줘 밤늦게까지 마음 놓고 놀 수 있던 몇 안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 통금이 있었던 50~80년대 / 출처 : 국가기록원 |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 철수작전
한편, 6·25 전쟁 기간에는 미군들에 의해서 성탄절의 의미가 새롭게 전파됐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4개월째, 밀려오는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전세가 역전된 국군과 UN군은 흥남에서 철수를 계획했다. 국군과 UN군의 철수 소식에 피난민들이 흥남으로 몰려들었고 그 숫자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본래 군 병력만 철수할 계획이었지만 ‘피난민을 태워주지 않는다면 우리도 육로로 후퇴하겠다.’며 반발하는 국군 지휘관들의 반발에 결국 피난민까지 포함해 철수하기로 한다. 하지만 피난민과 비교하면 선박은 턱없이 부족했다. 열흘간 이백여 척에 가까운 선박이 동원되어 병력과 피난민을 철수했지만, 여전히 14,000명의 피난민이 항구에 남아있었다. 1950년 12월 22일, 더는 민간인을 태울 수송선은 없었고 남은 배는 물자수송을 위해 항구에 정박 중인 정원 60명인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지휘부는 남은 인원을 모두 데려가기로 하고, 선장은 무기와 물자를 포기하며 피난민들을 배에 태웠다. 피난민들 또한 짐을 바다에 버려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그 결과 23일 오전, 14.000명의 피난민이 탑승을 완료할 수 있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의 230배가 넘는 인원을 태운 채로 부두를 떠났다. 3일간 항해를 계속했고 14,000명의 탑승자 중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채, 오히려 5명 아이를 출산해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이러한 한국전쟁의 영향은 성탄절을 일제강점기의 소비와 여흥의 문화에서, 드디어 끝난 전쟁을 향한 기쁨과 새로 태어난 어린아이들을 위한 축복의 날로 자리 잡게 되었다.
▲ 흥남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모인 피난민들 / 출처 : 국가기록원 |
구세군 자선냄비의 확산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붉은 냄비와 딸랑이는 종을 흔드는 자원봉사자이다. 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전국 각지에서 구세군이라는 이름으로 모금 운동을 한다. 1928년 시작한 한국의 자선냄비 모금 운동은 90년이 지난 현재까지 전통을 유지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만 펼쳐지던 구세군 자선냄비는 1980년대 이후부터 전국으로 급격히 확산하면서, 연말연시엔 춥고 배고픈 이웃에게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눈 오는 거리에서 울린 맑은 종소리는 힘든 시기를 지내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고 한 푼 한 푼 모인 금액들은 비록 날씨는 춥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 사람들의 마음을 데운 자선냄비 / 출처 : 국가기록원 |
우리 대학의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 대학도 새롭게 성탄을 맞을 준비를 시작한다. 교내에 트리가 장식되고 학우들이 많이 이용하는 식당도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습으로 변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식당에서 친구, 선배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으면 벌써 크리스마스라도 온 것 마냥 들떠지기 시작한다. 기숙사 식당 내부 또한 크리스마스를 맞아 화려하게 변신했다.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무렵이면 층계에는 예쁜 빛 망울이 가득한 꼬마전구들이 가득하다. 군데군데 붙어있는 눈 장식 또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잘 살렸다.
▲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기숙사 식당 내부 / 촬영 : 박사랑 기자 |
오늘날 성탄절은 종교와 상관없이 한국인 대부분에게 한 해를 마감하는 기념일로 인식되고 있다. 산타클로스가 가져다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선물해준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성탄절이 중요한 상징의 하나로 정착하는 데에는 국가의 공휴일 정책과 기독교도의 증가도 있겠지만, 자연스레 우리의 역사 속에 녹아든 이유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