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ME IN(평론 가작)
조경란의『식빵 굽는 시간』과「학습의 」
LET ME IN
Ⅰ. 서론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리스트의 『Let Me In』이라는 소설이 있다. 뱀파이어 소녀와 소년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스웨덴에서 영화로 만들어졌고, 곧 이어 미국에서도 제작되었던 베스트셀러 소설이다. 소녀가 소년을 맞이할 때, 말하는 ‘Let Me in’이라는 말은 한국어로 뜻을 표현하자면, ‘내가 네 안에 들어가도록 해줘.’라는 뜻이다. 뱀파이어 소녀가 인간 소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과 동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세계에 ‘들어간다.’라는 이 관계는 뱀파이어뿐만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는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자아는 타자로부터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방인이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으로,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어디에도 편입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가 되는 이방인.
그런 의미에서 조경란의 작품은 이방인과 같다고 표현 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들을 이방인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녀가 말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겉도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존재들은 자신만의 궤도를 돌 뿐이다. 가족이지만, ‘우리’라는 친밀성은 없고, 연인이지만 ‘애정’이 없는 인물관계는 모든 인물들의 성격마저 건조하고, 무덤덤하게 만든다. 기쁘게 웃지도 않고, 통곡하며 울지도 않는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다독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간다.
조경란의 초기 작품이자, 제 1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준 「식빵 굽는 시간」은 조경란 작가의 진가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빵 굽는 시간」에서 느꼈던 감정을 「학습의 」에서 그대로 느끼게 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같은 작가가 썼기에 변하지 않았던 표현과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세월의 흔적만큼 변화되고, 성숙한 무엇인가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식빵 굽는 시간」과「학습의 」을 통해 작가 조경란에 대해서 알고 싶어진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소외라는 키워드에서 타자와의 거리감을 발견하려 했다. 또한 타자와의 거리가 나아가는 방향도 파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작가가 공간을 통해 말하는 상징에 대해서 깊이 관찰하려 하였다. 이 두 작품을 통해, 확연하게 대조되는 각 상황에 대한 극복방법은 독특한 차이를 갖고 있기에 더욱 흥미로울 것이라 기대한다.
Ⅱ. 본론
1. 타자와의 거리
「학습의 」에서 ‘나’는 이혼한 남편과의 관계에서부터 교사로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그들의 삶에 깊게 관여할 마음도 없었으며, 애정도 없어 보인다. 그저 지켜보며 방관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녀는 남편이 원하던 것처럼, 그 대상에게 자신이 속하게 되기를 스스로 노력해야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교직에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럴 만한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것도 아니다. 내가 선생으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거나 신뢰가 가지 않는 유형에 속했을 수도 있다. 교과서를 잘 활용해도, 나로서는 진심이라고 해도 좋을 인생의 충고를 해줘도 학생들의 도덕성은 높아지지 않았고, 더 친밀해지지도 않았다. 그뿐이었다.
교직에 있을 때 역시 아이들을 믿지 않았고, 신뢰를 갖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어떠한 애정도 없다. 마치 지구가 태양을 돌며 끊임없이 돌고 있듯 자신만의 궤도(軌道)에 위치해 있었다. 벗어날 수도 없었고, 자신의 자리는 원래 그곳인 것처럼 그녀는 삶의 주변을 돌고 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무중력 상태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녀는 겉도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견딜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그녀는 태양의 중력에 붙잡혀 돌고 있는 행성들처럼 겉도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다른 이의 삶에 속해지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에 누군가 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불안에 시달리고, 삶에 권태를 느낀다. 더군다나 무중력상태에서 뼈와 근육이 쇠약해지듯, 병은 불안처럼 그녀를 좀먹는다. 그때의 그녀에게 들리는 쿵! 하고 떨어지는 투포환의 쇠공소리는 그녀의 위치를 흔들어놓는다.
무순상회의 식료품을 배달해주는 ‘무순’이라는 소년은 허리가 다쳐 투포환대회에 나가지 못한다. 거기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온몸이 멍들고, 주눅이 들어있다. 이 소년은 그녀에게 뜻밖에 제안을 하는데, 마당에서 투포환연습을 하도록 빌려달라고 한다. 투포환 연습을 하는 소년을 보며, 그녀는 자신이 낯설게 웃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이의 삶에 개입하고 싶지 않지만, 소년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웃는 아이를 맞바라보았다. 무순이 살찐 목을 뒤로 젖히고 진짜 애처럼 천진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지만 더 낯선 것은 내가 웃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왜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무순과 한번 터드린 웃음이 시도 때도 없이 새 나올 때가 있었다.
소년이 던지는 투포환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리게 한다. 중력처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듯 공을 쏘아 올리는 난쟁이아버지의 모습처럼, 소년은 가망 없는 현실에서도 쇠공을 던진다. 쇠공이 세상에 머무는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지만, 소년은 또 던지고, 던지며 꿈을 향해 나아간다.
꿈의 열기에 들뜬 소년을 보며 그녀가 애정을 느끼는 것은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중력에 철저하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무중력공간에서 시작한 운동력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듯이 그녀는 불안의 삶을 멈추지 못한다. 이런 그녀가 소년을 만나며 궤도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상회 여자가 보내는 경고는 불안한 평화와 고통의 멜랑꼴리한 상황으로 그녀를 몰아놓는다. 그것에 항의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답답함은 결국 소년과의 관계마저 갈라놓는다.
남편과 무순으로 대조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각각의 계기를 통해 촉발된다. 남편이 정관수술을 받고 온 그때부터, ‘나’는 남편에게서 멀어진다.
내 배 속의 아이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간신히 교합했을 떄 만들어진 생명이었다. 남편 말대로라면 남편이 수술 받기 전 나와 최후로 나눈 행위에서 비롯된, 아이는 자연유산되었다. 그 일과 남편의 고백은 우리 관계에 대한 결정권이 나에게로 넘어왔다는 걸 뜻했다. 같이 더 살아야만 했더 나머지 시간은 수숩의 상태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순과의 관계는 지갑을 잃어버린 부분에서 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 무순상회 여자가 그녀와 무순의 관계를 비난한 때부터 시작된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누구의 삶에도 개입하고 싶지 않은 쓸쓸한 평온함을 택하며 무순과 거리를 둔 것이다.
우리의 신뢰, 아니 우정은 끝난 거라는 그 명시적인 사실밖에 없었다. 너는 내가 유일하게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 분노 밑에 깔린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대해 다 말하게 될까 봐 나는 다시 말했다. 겨우 이거 였니.
어디에도 개입하지 않으려는 삶과 그에 대한 두려운 애정은 그녀를 더욱 비틀거리게 한다. 이방인인 그녀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준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갖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곧 자신의 세포를 죽여 가는 병은 그녀의 육체 뿐 아니라, 심리적 죽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학습의 생에서 드러난 개입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갈등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도 잘 나타난다. 학습의 생이 타자를 자발적으로 외면했다고 한다면, 「식빵 굽는 시간」은 타자로부터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가가려고 노력하지만, 외면당하고, 상대와의 거리감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이들의 생활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받는 거절에서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식빵 굽는 시간」은 빵을 만드는 장면들을 배경으로 주인공 ‘강여진’의 출생비밀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모 사이의 갈등과 외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진이 애정을 갖는 ‘한익주’라는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미묘한 관계는 건조하지만, 담담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30살을 맞이한 여인의 담담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내면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조경란의 매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식빵 굽는 시간」에서 표현되는 인물관계의 소원한 설정이 돋보인다. 또한, 여진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관계의 갈급함을 보여주면서도, 어느새 포기해버리는 초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30살의 여자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나, 끝없이 거절당하는 여진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겪는 이방인처럼 외면당하는 소외를 확인할 수 있다.
어째서 어머니가 아버지나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인 나를 거부했는지 그건 정말이지 아직도 잘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때 어쩌면 어머니가 언젠가는 나를 버릴 거라는 예감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을 때, 나를 쳐다보던 어머니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아주 낯선 타인처럼 어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버지와 이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건조한 상황은 그녀가 철저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빵이라는 애정을 아버지에게 전하지만 결국에서 빵이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철저하게 아버지에게마저 외면당하는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에 완벽한 무표정이 있다면 바로 그때 나를 쳐다보던 아버지의 표정이 그럴지도 몰랐다.
“그만 둬라. 이제 빵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아버지는 내가 내밀고 있던 종이봉지를 밀어내듯 툭 쳤다. 그 바람에 빵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렷다. 아버지는 흠칫 놀란 것 같았다. 한쪽 손에서 우산이 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똑바로 아버지를 응시하였다. 아버지의 검은 얼굴에서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히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겉돌며 상처받는 ‘나’는 사람들과 거리감을 두는 방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 내게로 걸어 들어오는 타인의 불신이나 불행을 튕겨내기 위한 방패를 마련한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며 현재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와의 관계뿐 아니라 ‘한익주’라는 남자에게까지 이어진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나’는 특이한 방법으로나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조경란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상징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 뿐만 아니라, 학습의 생에서도 잘 드러난다.
2. 애정의 공간
조경란이 활용하는 ‘공간’의 의미는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두 작품에서는 주목할 만한 공간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학습의 」에서는 ‘마당이 있는 집’이라는 장소가 등장하고, 「식빵 굽는 시간」에서는 ‘구석진 방’이라고 불리는 ‘한익주’의 방이 나온다. 이 두 공간은 앞서 말한 주인공들의 애정과 소통의 공간이다. 표현하자면, 인물의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학습의 」에서는‘마당 있는 집’이 ‘나’의 마음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 공간은 누구도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공간으로 폐쇄적이며, 은밀한 곳으로 묘사되는 것이다.「학습의 」에서 그녀가 타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이며,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 집의 위치를 설명해야 할 때면 매번 곤혹스러워진다. 나는 집을 찾아오는 방법을 종이에 써보았다. 올림픽대교를 타고 미사리 쪽으로, 팔당대교 방향으로 오다가 양평 가는 이정표 보고 오른쪽으로 쭉 빠져 네 개의 터널을 지나 조안면 방향으로, 구 양수대교를 건너 직진, 왼쪽 버스정류장을 끼고 좌회전, 서종면 족으로 팔 킬로미터, 명달리 노문리 쪽으로 우회전, 다리 세 개를 건너 세 번째 다리에서 직진, 언덕 넘어 오른쪽 밤색 벽돌집.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이 집은 정말 여기에 존재하는, 실체를 갖고 있는 집 같기도 하다...... 다리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 다리 앞에서 사람들은 망설이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을 따름이다. 그래도 이 집은 진짜 존재하는 공간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마당 있는 집’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도 되는 걸까하고 고민하게끔 만들게 한다. 누군가의 내면에 깊이 관여할 때, 망설이며 조심스러워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방문에 ‘나’는 ‘마당 있는 집’이라는 실체, 곧 자신의 내면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라는 고민을 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공간은 뜻밖에 ‘무순’이라는 소년에게 허락된다. 투포환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마당을 빌리겠다는 소년의 제안은 그녀를 전환시키는 사건이 된다. 소년에게 마당을 허락한 이후, 그녀는 소년의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자동차 운전도 알려주며, 친밀한 사이가 된다. 어느새,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라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다 무순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후 그녀는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마라.’라고 말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이처럼 ‘마당 있는 집’이라는 홀로 있는 실체의 공간과 자신의 내면이 일치되며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식빵 굽는 시간」에서는 ‘구석방’이라는 공간이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구석방’에 세 들어 살던 ‘한익주’를 사랑하게 되면서 여진에게 ‘구석방’은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이층 창가에서 그 남자가 오가는 것을 계속 관찰하게 되며, 그 남자의 옆모습을 훔쳐본다.
그즈음 나는 여분의 열쇠를 사용하여 몰래 그의 방에 숨어들고는 하였다. 나는 그의 세계를 엿볼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여느 방처럼 옷장과 책상이 있고 옆집 담 너머로 향해 있는 창가 쪽에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방에 드나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어떤 흔적 같은 거였어요. 물론 당신은 아무것도 남기고 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그런데 뭐랄까 아무튼,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냥 뭔가...... 휘엉했습니다......”
그의 방에 몰래 드나드는 것을 들키지만, 그런 것은 그와 그녀에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구석방’에서 마주한 둘은 함께 쓸쓸한 생일을 맞이한다. 이 ‘구석방’이라는 공간은 그만의 공간으로, 그의 깊숙한 내면이라고 할 수 있다. 푸른 줄무늬 시트가 씌워져 있고, 켄트지 가득 온갖 낙서가 휘갈겨져 있는 공간. ‘한익주’의 일상뿐만 아니라, 깊은 어둠마저 담아내고 있는 공간 말이다. 이러한 공간에 그녀가 수시로 드나드는 것은 누군가의 내면에 들어가는 방법은 그러한 공간에 출입하는 것과 같다는 작가의 의식이 드러난 것일지 모른다. ‘한익주’의 생일을 축하한 후 중얼거렸던 그녀의 생각은 이러한 공간의 의미를 더욱 짙게 말해준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뚜벅뚜벅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어디론가 이끌려가고 있었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그 방에 드나드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공간에 진입하는 것은 내면으로 들어오는 존재와 같다. ‘구석방’으로 들어왔던 그녀가 ‘한익주’에게는 그러했을 것이며, 그녀의 마음속에 걸어 들어온 그도 그러하다. ‘구석방’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한익주’가 사라진 후에 방을 비워야겠다는 이모의 말에 반대하며, 계약한 기간까지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수시로 ‘구석방’을 드나들며 그녀는 ‘한익주’를 기다린다. 이렇게 「식빵 굽는 시간」과「학습의 」에서 나타나는 공간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출입하는 존재와 공간의 개방은 곧 마음을 여는 과정과 함께 드러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이렇게 공간을 통해서 내면의 소통을 말하는 조경란 작가의 말하기를 살펴보았다.
Ⅲ. 결론
조경란 작가의 말하기는 담담하면서도 건조하다. 사람들 간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으며, 각 인물들의 감정표현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답답하고 우울한 문체는 존재가 내면을 바라보는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하지만, 도리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회피하려는 인물들도 보인다. 이처럼 조경란의 소설은 자아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않는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누군가의 개입을 거절하거나, 또는 거절당한다.
「식빵 굽는 시간」에서 딸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던 어머니. 따뜻한 눈길로 딸을 바라보기보다 늘 외면했던 아버지. 자신이 낳은 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했던 이모. 어느 날 훌쩍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한익주’. 식빵 굽는 시간에서 나타나는 여진이 당하는 거절들은 그녀가 결국에는 누구의 삶에도 관여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여진의 고백처럼 자신의 인생과 관계되지 않는 것들은 조금도 알고 싶지 않고, 상관없는 것에 신경 쓰는 것은 피곤하다.「학습의 」은「식빵 굽는 시간」비교하여 보면, 거절당하는 관계라기보다 거절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의 평안함 삶에 개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끊임없이 타자와 충돌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충돌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때에 주인공들의 대응방식을 보면「학습의 」과 확연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조경란의 초기 소설인 「식빵 굽는 시간」과「학습의 」에서는 그녀 나름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모를 위해 그 안에 가루로 만든 아스피린 20알을 쏟아 넣은 ‘크레프’를 만드는 것은 그녀만의 복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모와 같이 눈 밑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점을 병원에서 제거하는 여진의 모습 또한 이에 대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당목낫’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되었다는 ‘한익주’의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장면은 더 이상 그들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학습의 」은 자신을 괴롭히는 상황에 맞서기 보다는 견뎌내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쉰 음식들을 보내는 상회여자에게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에서 수치스러운 비난을 일삼을 때도 그녀는 참을 뿐이다. 그렇게 참는 것이 평온한 삶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과 유일하게 소통하던 ‘무순’을 외면한다.「학습의 」의 결말에서 볼 수 있는 소극적인 모습은 ‘쿵!’하고 지면을 울리는 투포환의 소리로 변화될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한 결말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각각의 대응방식은 같은 작가가 썼지만 생경하게 다가온다.
조경란은 이러한 인물 간의 거리와 이방인처럼 외떨어져 있는 존재에 대해서 잘 표현하였다. 그러한 존재들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활용했던 ‘마당 있는 집’, ‘구석방’은 주인공이 타자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개입하거나, 개입되기를 허락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허락과 동의는 앞서 말한 『LET ME IN』이라는 소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곳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물음은 「식빵 굽는 시간」과「학습의 」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식빵 굽는 시간」에서 계속해서 거절 당하면서도 다가가려고 애썼던 여진의 모습은 ‘제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애절한 절규와 같았다. 이에 비해,「학습의 」에서 자신의 공간을 폐쇄시키고 누구도 들어오지 않도록 애썼던 ‘나’의 모습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완강함을 보이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겉도는 존재는 조경란의 소설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들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들의 화합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현대인 개인의 소외와 지독한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에 누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조경란 소설 식빵 굽는 시간과 학습의 생에서 발견한 많은 관계와 상징은 의미 있었던 것이다.
참고 문헌.
조경란, 「식빵 굽는 시간」, 문학동네, 1996,
조경란, 『2011 황순원 문학상 』, 「학습의 생」, 문예중앙,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