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의 기원(소설 당선)

말(言)의 기원

 

“몸에 열이 높고 혈압도 정상이 아니에요. 어제 체온이 급격히 내려간 것 같은데 아마 오랜 시간 그 상태로 지속돼 있었던 것 같네요. 침팬지가 영장류 중에서도 예민해서 온도에 민감해요. 인간으로 따지자면 몸살감기정도 걸린 거에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며칠간 잘 보살피고 푹 쉬면 나을 거에요.”

수의사는 구아에게서 체온계를 떼며 실내를 너무 뜨겁게 하면 공기가 건조해져서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온도 조절을 잘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돌아갔다. 경비실에 전화해보니 어제 저녁 배관시설 점검 때문에 연구동 건물 전체가 잠깐 정전된 것이 온열기를 멈춘 화근이었다. 가뜩이나 구아의 학습이 더뎌지고 있는 판국에 몸살이라니 악재가 겹치고 있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2년 6개월 전,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 할 때도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La socit n'admett aucune communication concernant l'origin du langage."(본 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문을 더 이상 접수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파리언어학회>가 이미 1886년에 제정한 이 회칙은 신의 선물설과 인간의 발명설 사이를 수 세기 동안 공전한 주제였던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연구결과의 마지막 종착역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가. 이것은 언어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으나 지금껏 이것을 명백하게 규명해 낸 어떠한 연구성과나 합리적 결과물도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것을 밝혀낸다하더라도 효용성 면에서 큰 가치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구는 이익단체에서 연구기금을 수주받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그것은 지적 호기심에 관한 문제이지 그것을 안다고 해서 언어를 쉽게 습득한다거나 만국 공통언어를 새롭게 개발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경제적 가치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 간혹 어렵게 연구비를 따내 사업승인이 나더라도 합리적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 연구는 금방 끝나버리곤 했다.

지도교수가 최종 박사학위논문에 승인 도장을 찍으면서 프로젝트의 말을 꺼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진로는 정해졌는가?”

“감사합니다. 교수님. 논문에 머리를 너무 많이 써버려서 당분간 집에서 쉬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잘 됐네. 이번에 교과부에서 중규모 연구과제 승인이 났어. 기간도 3년이고 의대랑 융복합사업으로 하는 거니까 연구비 규모도 꽤 클 것 같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 네.”

“언어 습득의 기제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거야. 요즘 다 애들 하나씩밖에 안 키우잖아. 그러면서 또 다들 맞벌이 하느라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게 시기적으로 점점 늦어지고 있는거야. 심한 경우는 커서도 말을 제대로 못해. 하더라도 발음도 부정확하고 입에서 우물거리게 되지. 그래서 인간의 언어습득 시기, 그리고 어떻게 언어가 습득되는지 그 방법을 밝혀 내는거야. 이것만 밝혀낼 수 있다면 적절한 시기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애들에게 언어를 가르칠 수도 있고 한 발 더 나가면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들 치료 방법도 개발할 수 있고. 근데 이게 임상실험이 될 리가 없지. 그걸 허락할 미친 부모도 없고 정부 승인도 안 날 거고. 그래서 선택한 게 침팬지야. 진화론적으로 볼 때 인류와 가장 가까운 영장류가 침팬지거든. 유전자도 비슷하고. 인간과 소통방식이 다르더라도 그들만의 언어습득 시기나 유형은 인간과 비슷할 거란 말이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을 가르치다 보면 언어습득에 관한 힌트가 나올 것도 같고. 이게 돈 냄새가 나는지 벌써부터 외국계 의료회사 들어봤지 자네도? 세라믹이라고. 거기 투자설이 쫙 퍼졌어. 거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관심들이 난리야.”

“그런데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자네가 적임자야, 적임자. 자네도 알다시피 최근 3년간 음운론으로 박사학위 딴 사람들이 전무해. 석사 중에 쓸 만한 놈들도 없고.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책임 연구원을 맡아줬으면 하는데. 어때?”

“좀 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양반 또 시작했구나. 지도교수는 끊임없이 연구를 물어왔다. 그것이 그의 진정한 능력 때문이지 그가 갖고 있는 국내 굴지의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소문이었지만) 교과부에 널려 있는 그의 행정고시 출신 대학 동기들이 연구발주와 예산집행을 결정하는 주무관의 자리에 널리 포진해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전혀 생산성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놈의 원숭인지 침팬진지 하는 놈들의 우갸우갸 소리를 갖고 사람의 의사소통 체계를 규명해낸다니. 그걸 승인한 교과부에는 아마 침팬지보다 더 멍청하거나 비슷한 공무원이 있을게 틀림없었다. 또 연구주제는 내 세부 전공과 연관이 없었을 뿐더러 내 학문적 관심과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지도교수에게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그때 나는 박사학위 논문 때문에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고 그 연구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연구책임자 자리를 OK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이수철, 그 녀석이 교과부로부터 똑같은 규모의 연구사업을 승인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은 의미론 연구자였다. 구체적으로 발화된 음성(音聲)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자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그의 주요 학문 영역이었다. 그는 나보다 일 년 먼저 학위를 받고 그의 지도교수 연구실에서 박사-후(Post-Doc) 과정을 밟으면서 논문을 심화시켜 출판하기 위한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학계에서 그가 내놓은 박사학위 논문은 일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논문 제목은「생명 종식어에 대한 연구」였다. ‘죽음’의 의미자질을 고찰하여 세 부류로 나누고 그 속성을 분류하는 작업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지표뿐만 아니라 해당 어휘가 생긴 기원과 구체적 화맥, 쓰이는 용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고찰까지 덧붙여져 그를 학계의 대스타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어의 죽음에 관한 어휘를 총망라하다시피한 그의 논문은 그 해 영문으로 출판되어 미국 언어학회에서 주관하는 상까지 받았다.

 

<죽다. 별세하다. 가다. 돌아가다. 소천하다. 승천하다. 천국가다. 영혼이 떠나다. 영결하다. 세상을 버리다. 이승을 버리다. 운명을 달리하다. 불귀의 객이 되다. 사망하다. 목숨버리다. 삶을 마치다. 고인되다. 뒈지다. 급사하다. 밥숟가락 놓다. 자살하다. 지하에 가다. 혼이 떠나다. 황천가다. 눈 감다. 심장이 멎다. 몸이 식어지다. 거꾸러지다. 인생을 버리다. 자결하다.…>

 

그의 책상 앞에는 이런 말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항상 가득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책상은 죽음의 박물관인 셈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에 대한 감각은 나를 끝없이 지치게 만들었다. 학부시절 그와 나는 과내에 있는 같은 시 창작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신입생들의 신작시 비평회 날이었다. 감정의 지나친 과잉이나 절제되지 못한 언어로 나열된 그렇고 그런 시들이 읽혀지고 마지막으로 은아의 시만 남았다. 은아는 밝은 성격과 매력적인 외모로 동아리 남자 선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은아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었고 고백만 안 했을뿐 은아와 난 지속적으로 만나오고 있었다. 나는 은아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비웃으며 은아에 대한 나의 상대적 우위 때문에 입가에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감추느라 애써야 했다.

시낭독이 끝나고 나자 모두들 감추고는 있었지만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이전 신입생들의 시와는 분명 달랐지만 단순히 의미를 캐내기도 어려웠고 잘못해서 말을 꺼내기에도 조심스러웠다. 그때 한 선배가 침묵을 깼다. 비평회 전부터 항상 유심히 은아를 쳐다봤던 형이었다.

“훌륭해. 왠만한 2학년 애들 시보다 나은걸. 비유도 참신하고 기성 시와 문체도 달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

“거기까지 하시죠.”

갑자기 그 녀석이 말을 끊었다.

“은유의 간격이 너무 좁다. 동굴에 어둠을 비유하다니. 비유가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서로 극과 극에 있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조립시켜 인식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야 참신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동굴과 어둠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안드나? 보법도 너무 평범해. 그러니까 발상도, 조형법도 엉망이지. 이건 시 흉내만 낸거다.”

그 한마디를 하고 그는 시가 인쇄된 종이를 찢어버리고 일어났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적 때문에 모두들 한동안 멍하게 있었지만 선배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뒤에서 붙잡고 주먹을 날렸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유유히 주먹을 피한 그 녀석은 선배의 배에 역으로 강한 주먹을 날렸다.

“형의 시와 똑같군. 기교에만 빠져들어서 허울만 있는 속 빈 강정같은. 내가 지난 번에도 말 했을 텐데. 시든 주먹이든 짧게 끊으라고. 덕지덕지 기교만 쌓이니까, 의미가 퇴색되잖아.”

정통으로 복부를 강타당한 선배는 낑낑대면서도 그 녀석이 나가는 방향을 보며 씩씩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 녀석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와서 모임을 헤집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 녀석의 말이 모두 옳았기 때문에 선배들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얼굴이 새빨게졌지만 그녀석이 나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 것은 단순한 내 기분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게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연구책임자를 승낙한 것은 한 번이라도 그 녀석을 이겨보고 싶어서였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그때까지도 죽도 밥도 안된 문학에 대한 열망을 접고 어학에 전념하기로 했을 때, 그 녀석은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녀석이 대학원을 간다고 하자 동기들 사이에선 모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것도 문학(文學) 전공이 아닌 어학(語學)전공으로.

세부전공으로 의미론을 택하고 싶었지만 음운론을 택한 것도 그 녀석 때문이었다. 의미론은 다른 언어학 분야에 비해 철학적이었고 음운론이나 통사론에 비해 학문적 성격이 뚜렷하게 성립되지 않은 미개척 연구분야였다. 그에 비해 말소리의 원리와 형태를 밝히는 음운론은 보다 보편적이고 이미 연구의 틀이 어느정도 잡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 녀석을 앞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문학에서 뒤졌던 것도 어학으로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달려가야 할 길이 명확한 음운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만들 수 없다면 빨리 달리기라도 해서 그 녀석과 나의 격차를 벌려놓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학위를 받을 무렵 그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정글숲을 늑대소년처럼 혼자 헤쳐나가면서 이미 나보다 한참이나 앞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교수가 내게 제안한 연구와 같은 규모의 프로젝트를 그가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번이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같은 연구비와 같은 기간, 장소까지 동일한 똑같은 환경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와 대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참이나 앞을 달려 나가고 있는 그와 동일한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한 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처음 연구 플랜을 짤 때 3년 안에 구체적 성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침팬지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선행 연구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많지 않았을 뿐더러 있다하더라도 논지의 흐름이 중간에 끊겨 명확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거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작위적으로 도출된 것 같은 의심해야 할 결과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너무 오래된 연구들이었으므로 선행연구를 아예 없는 걸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연구계획을 짜야할 판이었다.

3년으로 잡힌 1단계 사업의 세부목표는 침팬지에게 인간의 언어를 습득시키는 걸로 한정시켰다. 연구의 구체적 방법은 쌍둥이 침팬지 두 마리를 놓고 비교연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쌍둥이 침팬지 중 한 마리는 연구실 안에서 키우면서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기로 했고 다른 새끼 한 마리는 사육장에 넣고 어미랑 살게 하면서 언제 어떻게 그들만의 언어를 배우는지를 관찰하는 방식이었다. 종전에 진행됐던 연구에서 발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전의 연구들은 인간 중심으로 진행됐었다. 침팬지종의 고유한 특성과 서식형태가 고려되지 않은 채 진행된 연구는 인간의 입장에서 짜맞추기식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좀 더 과학적이고 세밀한 방법을 통해서 침팬지종의 언어 습득시기가 언제인지 그리고 그 시기에 그들 종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가르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한 구체적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비교하기 위한 통제변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일한 신체적ㆍ지능적 조건을 가진 침팬지 둘은 실험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올해가 연구과제 1단계 사업의 마지막 해였다. 이제 구체적 결과물을 낼 시간이었다. 성과가 없으면 2단계 사업으로 가지 못하고 떨어지게 돼 있었다. 아직 결과물을 종합하지 못한 나와는 달리 그 녀석은 가끔 마주치기라도 하면 언제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말 배우는 것을 멈춘 구아에게 성질이 났다.

구아는 태어날 때부터 어미 침팬지에게서 떨어져 나와 철저하게 인간에게 길들여졌다. 이미 그들 종(種)만의 의사소통 체계에 익숙해지고 나면 인간의 언어 인지체계에 대한 학습의지를 보일지 의문이었고 통제되지 못한 어떤 변수가 끼어들게 되면 언어학습 인자를 헷갈리게 해 실험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구아가 어미 침팬지에게서 떠나 처음 연구실로 들어왔을 때가 생각이 났다. 수의사는 나에게 아직 이름이 없는 구아를 안기며 예쁜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었다. 그때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은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구. 은. 아. 이미 내 것이 아닌 여자. 나는 그녀의 가운데 글자만 빼고 아기 침팬지에게 구아라고 이름 지었다. 만약 구아가 인간의 말을 순조롭게 배운다면 구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은아에게는 한 번도 들은 적도, 해준 적도 없는 말이었다.

그녀와 지속되고 있던 만남이 아직 사랑이라는 구체적 감정인 것을 확신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좀 더 그 사랑이 구체적 형상을 갖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실수였다. 그전에 나는 먼저 그녀에게 사랑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말이 은아의 마음을 붙잡았을 것이고 그 말로써 비로소 사랑이 구체적이고 확실한 형상을 획득했을 것이다. 은아가 내게서 떠나 수철에게로 간 다음에야 알았다. 때론 인생에서 확신보다 말이 먼저여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술에 취해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왜 내가 아니고 그 녀석이냐고 물어봤을 때 은아는 대답했다.

‘여자는 느낌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적어도 수철 오빠는 내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먼저 했으니까.’

구아가 만약 인간의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다면 처음 대화 상대는 나여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뇌의 중추신경에서 시작된, 의미로부터 발생한 뜻을 가진 말(言)이 아니라 단지 공기를 진동시켜 내는 소리 덩어리라 할찌라도 나는 구아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작정이었다. 때론 진심보다 말 그 자체가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내가 더 필사적으로 연구에 매달린 이유도 어쩌면 구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가르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나서부터 구아에게 단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차 연구보고서를 내야하는 3년이란 기간은 짧은 시간이었다. 인간도 언어를 배우려면 태어나고부터 4년 혹은 5년이 걸리는데 침팬지의 평균 생존기간을 고려했을 때 생후 6개월이라는 시점은 어쩌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침팬지가 어떤 시기에 언어를 습득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를 가르쳐야 하는 시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언어습득 훈련은 실물에 수화(手話)동작과 소리를 한꺼번에 학습시키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손동작이 발달된 침팬지의 특성을 고려한 방법이었다. 꽃, 나비, 물, 바나나 등 구체적 형상이 명확한 명사(名詞)들 뿐만 아니라 비교적 간단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기본 동작들(먹다, 마시다, 자다)인 동사(動詞)들까지 가르쳤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구아는 100단어 이상의 동작을 손으로 따라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었다. 반복된 학습의 효과는 분명 있었다. 놀라운 것은 한 번도 가르쳐준 적 없는 새로운 것들을 구아가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백조를 보고 물-새, 수박을 보고 물-케이크, 오이를 보고 녹색-바나나와 같은 합성명사를 수화동작으로 표현해냈다. 인간 언어만의 특징인 창조성을 침팬지에게 학습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결과가 입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땐 희미하던 실험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뭔가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수철이 녀석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이 솟구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구아는 말소리까지 따라하지는 못했다. 구아에게 “물”이라고 하면 컵을 내밀고 “바나나”라고 하면 접시를 내밀었다. 반복된 학습은 분명음성언어를 알아듣게 만들었지만 구아는 따라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인간과 구강구조가 다른 발음기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반복적으로 들려주다보면 정확하진 않더라도 인간의 말과 비슷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흉내정도는 낼 것이라고 생각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구아는 비슷하기는커녕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구아의 쌍둥이 침팬지에게서 인간과는 다른 그들 음성체계만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령 똑같이 들리는 것 같은 함성소리라도 분노, 놀람, 기쁨, 슬픔의 상황에 따라 미세한 억양이나 고저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이 항상 일관된 것이 아니었고 신호체계의 변별적 자질까지 분류해낼 수 없었지만 놀라운 것은 어미 침팬지의 대응 방식이었다. 아기 침팬지가 의사를 표시할 때마다 어떤 의사를 표시하는지 항상 구분해 냈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여준 것이었다. 침팬지만의 소리를 통한 언어체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였고 이것은 구아가 소리의 상징체계를 구별해 듣고 말하는 걸 배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구아는 생각보다 쉽게 그 체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결국 나도 실험 초기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했던 인간중심의 작위적 소통체계를 구아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아 너와 소통하기 위해 기다리고 침묵했던 내 시간들도 너한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 강요였을까. 지금 실험처럼 실체 없이 가능성만 가지고 사랑을 가늠하기만 하던 그 무수한 시간들이 지겨워서 너는 나를 떠나간 것인가. 너에게 다가가기 위한 소통의 방식은 조잡한 수화 따위를 조합시켜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촌스러운 방식이 아니라 비슷한 소리라도 침팬지 어미를 납득시킬 수 있는 새끼고릴라의 언어처럼 확실하고 명백한 사랑한다는 단 한마디 고백이었어야 했던 것인가.

 

지도교수한테서 아침부터 전화가 왔다. 내게 연구 책임을 맡긴 이 프로젝트 말고도 여기저기 일을 벌려놓아 쓸데없이 바쁜 지도교수가 아침부터 전화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 받으면서부터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쁠테니 용건만 말하겠네. 중간평가에서 자네나 수철군의 프로젝트 중에 한 건이 탈락하게 될 걸세. 우리 과가 중규모 연구 과제를 두 건이나 받아서 다른 과에서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야. 아마 한 건도 못 받은 중문과하고 일문과가 많이 불만인 것 같아. 우리 과가 두 개나 가져가서 자기네들이 하나도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미 수철군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고 사업 시작할 때부터 성과물도 구체적으로 있었으니까, 자네가 적당한 선에서 이번 중간보고 마치면 중단하는 걸로 하는게 어떨까 하는데…. 미안하게 됐네 그려.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다른 연구소 자리 알아봐줌세. 어찌됐든 다른 과 교수들이랑 다 얘기 된 문제니 그렇게 알고 있게. 교과부 평가위원들한테도 다 말해놨어. 정 억울하면 중간보고 때까지 수철군 것보다 더 큰 연구성과를 내게. 아무튼 두 프로젝트 중에 성과가 더 큰 것만 계속 될거네. 끊겠네.”

지도교수가 다음 단과대 학장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대학원생들 사이에도 이미 공공연히 퍼져 있는 소문이었다. 투표를 앞두고 벌써 눈치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학부시절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도교수는 연구와 강의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명성과 연구비만 쫓아다니는 전형적인 폴리페서였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로 더욱 뼈저리게 안 사실이었다. 그 뒤치다꺼리를 다하면서 박사학위를 받느라 들인 시간과 공을 생각하면 지나간 젊음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 결과로 돌아온 보상이 프로젝트종료 통보였다. 자신의 영위를 위해서라면 제자도 한순간에 팽시킬 수 있는 더러움이 역겨웠다. 지도교수는 둘 중에 한 프로젝트만 남을 거라고 했지만 이미 내 연구를 끝내는 걸 기정사실화해놓고 있었다. 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똑똑-

“중간보고 준비 잘 되가나?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러 왔다.”

수철 녀석이었다. 이미 그 녀석도 지도교수한테서 언질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입가에 잔잔히 머금고 있는 그 녀석의 미소가 나를 비웃기 위해 한층 더 치켜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일이냐? 아침부터. 진짜로 커피 얻어 마시러 온 건 아닐테고?”

“나는 너 찾아오면 안되냐? 동기끼리 야박하게 왜 그러냐?”

녀석답지 않은 핀잔에 내가 좀 지나쳤나 싶어 계면쩍어졌다.

“침팬지말야. 구아라고 했었나? 말 많이 배웠냐?”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하게?”

“까칠하기는. 나도 너한테 말 하는 것 좀 배워보려고 그런다.”

“지금 장난하냐?”

“장난이 아니다. 꼭 필요해서 그런다. 실례인 건 알지만 혹시 결과물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좀 볼 수 있을까?”

“갑자기 와서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실험도 다 안 끝났지만 다 끝났다 해도 못줘. 알잖아. 산학협력이라 반은 기업에서 연구비 지원받고 있다는 거. 구체적 자료는 전부 기밀사항이다.”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거 아니냐.”

“글쎄 안된다니까. 너답지 않게 오늘 왜 그러는 거야? 나가봐라. 난 너처럼 한가하지 않아서 바로 또 연구 시작해야 된다.”

평소 그 녀석답지 않은 태도였다. 나한테 뭔가를 이렇게 집요하게 부탁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 내용을 보여 달라는 것은 발표 이전에 결과물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기고 물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태도나 말이 희한하긴 했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도교수의 전화 덕분에 연구의 결과물에 대한 필요는 더욱 확실해졌다. 언어습득의 기제만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돌려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연구의 초기 수행일지부터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마디도 말을 못하는 구아를 보면서, 인간언어에 대한 인지체계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침팬지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한 연구수행절차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구아에게 발음하기 쉬운 말부터 한 개씩 가르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인간으로 치면 치아가 없고 구체적 음성을 활발히 만들어내는 조음체인 혀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아기들이 내는 첫 번째 소리가 양순음(兩脣音)이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만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비교적 발음하기 쉬운 소리였다. 그래서 동ㆍ서양 아기들 모두 처음 내는 소리가 아빠(파파)이거나 엄마(마마)인 것이다. 아빠, 엄마, 바나나 등 구아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양순음을 수화를 하면서 그 앞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구아는 따라하지 못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이 시점에서 연구는 정체에 빠져 들었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1차 보고서를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발음하지 못하는 침팬지라면 더 이상 연구는 의미가 없었다. 구아가 보여준 인간언어의 학습에 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사람의 유아기에 적용하면서 연구를 끝낸다면 지금껏 있어왔던 그렇고 그런 연구와 다를게 없어진다.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획기적이고 실현 가능한 말하기 훈련이.

문득 머릿속에서 대학원 시절 책에서 읽었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덥지 않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어는 신이 주신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고대 이집트의 왕 쌈메티쿠스는 어떤 언어와도 접촉 없이 자란 아이가 자발적으로 맨처음 사용한 언어가 원어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두 아이를 사회와 격리시킨 채 양과 더불어 자라게 했다. 그 결과 두 아이가 처음으로 발성한 것이 ‘bekos’였으며, 이 말은 프리지아어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리지아어가 인간의 최초의 언어로 판명났다. 나는 구아에게 다가가 입으로 인류최초의 언어를 반복적으로 발음해보았다. 베코스. 베코스. 그리고 양입술을 오므려 양순음을 내기 위한 동작을 취해 구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런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구아의 얼굴에서 은아의 얼굴이 환영처럼 겹쳐 올랐다.

‘은아야, 제발 내 소원 한 번만 들어줘라. 응?’

 

다음 날 일찍 이비인후과 김지훈 교수를 찾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좀 더 의학적인 관점에서 발음의 구체적 과정을 자문받는다면 구아에게 말을 가르칠 수 있는 힌트가 나올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남으면 대학병원 뒤쪽에 있는 수의과 연구동에도 들를 작정이었다.

병원로비의 데스크에서 간호사에게 김 교수의 연구실을 물어보고 있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수척해 보이는 은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아픈 건가. 그 옆에 수철 녀석도 함께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은아와 함께 있는 그를 대학병원에서 만나다니. 일 년에 내가 대학병원에 오는 날을 세어봐도 오늘처럼 일이 아니라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와 나는 라이벌일까.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경쟁자에서 왔다던가. 옛날에 두 부족이 강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농경과 목축을 생업으로 하고 살던 부족들에게 ‘강물’은 관개(灌漑)를 위한 생명수였다. 두 부족은 가끔씩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강물에 절대 독약을 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렇다. 인간에겐 누구나 건드리지 말아야할 강이 있는 것이다. 나에겐 은아가 그랬었다. 은아라는 내 성역을 건드렸을 때 그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녀석과 나는 처음부터 맞는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하고 있는 연구도 그랬다. 연구의 성격과 목적도 달랐지만 표방하고 있는 주제역시 그의 연구와 내 연구는 끝과 끝의 대척점에 서있었다. 내 연구 주제가 인간이 언제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고 시작하는지에 대한 기원(基源)과 탄생에 대한 담론이라면 그의 연구는 죽음에 관련된 개별어휘에서 그 현상의 철학을 탐구하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었다. 연구 방법 또한 내가 구체적 음성으로 발현된 기표(記標)의 발생을 추적하는 것이라면 그의 연구는 기표가 담고 있는 기의(記義)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와 내가 대학원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는 학부시절부터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문법론 시간이었을 것이다. 품사의 분류에 관한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노교수는 ‘있다’가 어떤 품사로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수강생 전부에게 질문했다. ‘있다’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존재는 상태를 뜻한다.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성상(性狀)의 성질을 갖고 있는 품사. 나는 형용사라고 대답했다. 그는 즉시 나와 반대의 대답을 내놨다.

“‘있다’는 동사입니다. 오직 ‘있는 것’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들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있다’의 반대말은 ‘없다’가 아닙니다. ‘죽었다’입니다.”

노교수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정답은 수철군이 맞췄네. 하지만 형용사라고 생각한 것도 틀리지만은 않아. 처음에 품사를 정할 때 ‘있다’와 ‘없다’를 놓고 존재사(存在詞) 설정여부 때문에 의견이 설왕설래 많았지. 국어학자들도 쉽게 결정을 못 내렸을 만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동사일 수도 있고 형용사일 수도 있어. 결국엔 두 어휘 때문에 품사 하나를 새로 설정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있다’는 동사로, ‘없다’는 형용사로 결정됐지. 정답은 맞췄지만 답을 도출해내는 방식이 너무 직관적이야. 의미를 가지고 답을 맞춘 상상력을 칭찬해주고 싶네만 앞으론 통사규칙으로 설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게.”

그 녀석과 나의 결정적 차이였다. 내가 몇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책을 파고 들어야 하는 노력파라면 그 녀석은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는 천재였다. 그리고 그 직관에는 가끔씩 교수들마저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번득이는 영감이 있었고 그것이 나를 끝없이 절망으로 빠뜨린 원천이기도 했다.

사랑의 방식에서도 그랬다. 나에게 ‘있다’가 형용사이고 그에게는 동사였던 것처럼 어쩌면 은아가 느낀 나와 그 녀석의 사랑의 방식에서도 그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때로 ‘언어’는 말을 넘어서 실체와 행동을 규정하는 구체적 실현이 되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게 사랑이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성질이나 상태의 문제였다면 그 녀석에게 사랑은 존재해서 활발히 움직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죽음의 문제였다. 그에게 은아는 사랑하거나 말거나가 하는 성질이나 상태의 문제가 아닌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있다’의 문제였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동사(動詞)의 사랑에 은아가 반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기 일 년 전 은아는 그 녀석과 결혼했다.

나는 은아와 그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계단을 통해 간호사가 알려준 김박사의 연구실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김지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신 박사님 연구를 제가 도와 드리게 돼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쪽 이비인후과 병리학계에서도 신 박사님 연구에 대한 관심이 아주 큽니다.”

날카로운 눈매에 살짝 이마가 벗겨진 남자는 인상과는 다르게 서글서글하게 사람을 대했고 입바른 소리까지 할 줄 알았다. 많이 배운 사람 특유의 까칠한 면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오늘 드리는 상담은 프로젝트 특성상 비밀로 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연구단계가 마무리에 와 있어요. 침팬지에게 태어나자마자 가르친 수신호(수화)로 침팬지와 제한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해요. 약 100개나 되는 언어를 알아먹고 있죠. 문제는 소리에요. 훈련시킬 때마다 수화만 가르친 게 아니었어요. 손짓과 함께 발음도 같이 떠들어댔죠. 하지만 말 흉내는커녕 이제는 아무 소리도 못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말을 하게 할 수 있을지 상담하러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인간의 구강구조와 비슷하게 수술이라도 시킬 생각입니다.”

“아무 소리도 못 낸다구요?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글쎄요. 한 육개월 됐나. 강제로라도 소리를 내게 하려고 시도한 뒤로부터 이 녀석이 아예 찍소리도 안 내더라구요.”

“아마 실어증(失語症)에 걸린 것 같습니다.”

“실어증이요? 침팬지가요?”

“침팬지는 거의 인간과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침팬지의 뇌를 해부해보면 왼쪽 두뇌의 planum temporale(PT)이라는 부분이 오른쪽 것보다 더 큼이 관찰 되었죠. 이 PT는 음성-의미를 연결시켜주는 뇌수(腦髓)인데, 인간의 경우 왼쪽 PT가 더 크죠. 침팬지에게도 언어를 위한 신경저층이 있음을 시사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침팬지도 이 부분이 손상되면 실어증이 걸리기도 해요.”

“거기가 손상될 이유가 뭐가 있죠?”

“물론 손상되는 이유는 다양하죠. 극심한 스트레스나 충격이 오면 손상되기도 하구요. 아까 박사님 오시기 전에 왔다가신 이수철 박사님 사모님같은 경우죠.”

“네? 뭐라구요? 누구요?”

“아, 제가 말실수를 했나봅니다. 저는 두 분이 차례로 오셔서 다 아시는줄…”

“그럼 은아가 실어증에 걸렸단 말입니까?”

“자세한 건 이 박사님한테 들으시죠. 저는 함구하겠습니다.”

은아가 실어증에 걸렸다니. 아까 마주쳤을 때 초췌하던 모습은 다 실어증 때문에 그런 거였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그 녀석이 말을 배운다며 연구경과를 알려달라는 것도 모두 은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아는 병원에서도 못 고칠만큼 벌써 말을 잃었다는 것인가. 충격이었다. 나는 수의과병동에 들른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차를 몰고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카드키를 뒤적이는데 이미 열려 있는 문틈사이로 책상이 보였다. 어제 퇴근하기 전에 분명히 시건장치를 해놨었다. 구아 때문에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썼기 때문에 실수로 문을 열어놓고 퇴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침입자였다. 연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구아가 있는 우리부터 확인했다. 구아는 가르쳐준 수화로 나한테 인사하고 있었다. 안심이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실험경과를 적었던 파일들이 너저분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책상을 보자 연구의 데이터가 들어 있는 노트북이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재난이나 도난에 대비해 웹서버에 자동으로 백업 되어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연구가 밖으로 유출되면 큰일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건가? CCTV부터 확인해봐야 하는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수철의 얼굴이 번뜩 스쳐지나갔다. 아까 병원에서 내가 그를 봤다면 그도 날 봤을 거리였다. 내가 없는 틈을 타 노트북을 가져갈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미친 듯이 그의 연구실로 뛰어 내려갔다. 그의 연구실은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2년 반 동안 같은 건물을 쓰면서 처음으로 들어와 본 그의 연구실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책상 위에는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연구일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구내용이 아니었다. 종이에 인쇄된 양식을 무시한 채 휘갈겨 쓴 그의 유서였다.

 

어휘의 생성과 파생기제는 의미의 양상에 따라 다양하다. 죽음의 모형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에 의한 의미 차이는 ‘죽음’이라는 생명 종식 현상에 서로 다른 많은 어휘를 파생시켰다. 유한수의 규칙을 가지고 무한수의 문장을 생성해내는 보편적 언어 원리인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이론을 적용해 현대국어의 생명종식어에 대한 생성규칙을 규명하려던 나의 노력은, 실현된 언어의 구체적 모습인 표면구조가 다양하더라도 그것이 파생된 심층구조의 의미는 동일해야 한다는 원칙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세부의미자질의 차이에 따른 용례의 쓰임이 다르더라도 대상의 죽음이라는 영원불변의 기저현상은 변치 않을 거라는 나의 가정은 틀렸다. 공고히 구축해 놓았던 확고했던 나의 학문적 성벽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나는 지난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말’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에 천착해 왔지만 그 ‘말’을 잃는 것이야말로 생명종식을 뜻한다는 것을 나의 아내 은아의 실어증을 통해 깨달았다. 그녀의 실어증과 함께 우리의 사랑도 끝났다. ‘죽음’이라는 표면어휘의 기저에는 생명의 종식뿐만 아니라 사랑의 종식과 함께 언어의 종말이 있던 것이다. 유산의 충격과 함께 찾아온 그녀의 실어증은 그녀에게서 말만 뺏어간게 아니라 청력도 앗아가 버렸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논문의 발표나 출판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내가 모아왔던 죽음의 어휘인 기표들이 아니다. 나한테는 오직 기의인 죽음 그 자체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이제 그녀와 말이 필요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눈짓이면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 할 수 있으리라….

 

이 자식이…. 나는 그의 연구실을 빠져나와 차를 타고 그의 집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갔다. 마음속으로 제발 죽지 말아라를 수십 번도 넘게 간절히 외쳤다. 적어도 내가 너라는 강을 넘기 전까지 계속 살아서 존재해야 한다. 너도, 은아도. 말(言) 그리고 사랑의 실종이 생명종식과 동치라는 너의 논리는 틀렸다. 너의 그 사랑의 기원이 은아한테 했던 고백 한마디로부터 시작했던 것처럼, 은아가 다시 시작할 말의 기원도 너의 사랑으로부터 재생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생명종식어가 아니라 말의 기원인 것이다. ‘베코스, 베코스.’ 인류가 최초로 발음했다는 저 말의 기원이 나도 모르게 내 입속에서 터져 나왔다. 가슴 속에 빵같은 묵직하고 아릿한 슬픔이 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