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속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죽음이란 당장 두려움을 주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 더욱 두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 멀리 있고 삶이란 곧 자신 코앞에 있는, 바로 앞에 몰려온 거대한 쓰나미라 느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공포관리이론을 창시한 제프 그린버그(미국 애리조나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눈을 가리고 누군가가 옆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는 상상을 해보라 말한다. 언제 총을 쏴버릴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두려움, 죽음은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 언제 어디서나 다가올 수 있다는 것, 죽음 자체가 언제 어느 시점에 올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죽음을 통해 우리가 삶의 유한성을 직시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장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장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인간의 주체성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죽음에 대해서 지난 EBS 다큐프라임 'Death'는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보여주었다.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7세 미만의 아동 40명을 각 A, B그룹으로 20명씩 나누어 2명씩 짝을 이루고 각 그룹에서 짝을 이룬 두 아동에게 사탕이 2개씩 배분된다. 사탕을 누가 더 많이 얻느냐가 관건인 이 실험에서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아이는 상대 아이의 사탕을 가져가거나 또는 자신의 사탕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이는 이긴 아이가 한 행동을 그대로 취해야 한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 마다 사탕은 계속 2개씩 분배되고 아이들은 배분될 때마다 게임을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행동에서 사탕을 주는 행위에는 점수를 +1점, 사탕을 가져가는 행위는 -1점으로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각 짝에 대한 점수를 나타낸다. 마지막 사항에 대해서는 아이들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여 갈등을 협동상황으로 전환하는 팃포탯(tit-for-tat) 협상 전략을 바탕으로 고안된 이 실험에서 EBS 다큐프라임 팀은 여기에 재미있는 변수를 더했다. 실험 전 A그룹에 속한 아이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도록 사전에 수업을 하고 B그룹 아이들에게는 평소와 똑같은 수업을 진행했다. 이 변수는 놀랍게도 A그룹 아이들과 B그룹아이들의 평균 점수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한 수업을 진행한 A그룹 아이들은 서로의 사탕을 가져가는 행위보다 오히려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인 반면 B그룹 아이들은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는 행위보다 가져가는 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수치상의 지표를 비교했을 때 점수는 약 두 배 정도 차이가 났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중·고등학생들을 포함한 성인 남녀 4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는데 결과는 역시 같았다. 즉 죽음에 대한 인지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다 이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실험이다.
위 실험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고 하는 인류의 보편적 매개를 통해 인간은 순간의 이익보다 타인과 교감하고 공유를 통해 양자가 서로가 윈윈하는 방향을 선택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죽음에 대한 공감과 함께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서로가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에 대한 감성을 나누도록 한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잠깐의 사유가 단지 자신의 주체성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실험은 보여주었다. 인간의 이타심이 발현되도록 하는 또 다른 매개가 발견된 샘이다.
사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의 대학에서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한 논의가 그리 활발하지 않다. 특히 힘찬 청춘을 말하는 대학생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언어의 부정적 색깔과 더불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 피하고 싶은,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단어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더욱더 밝고 명량하라고 말한다. 행복한 삶, 활기가 넘치는 삶을 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이와 같은 긍정적 색을 갖고 있는 세계에 파묻히면서 우리 삶의 진실 된 가치에서 멀어지고 있다. 더 이상 우리 대학생들은 더 가치 있는 것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타나토스를 망각한 우리들의 관계는 점점 옅어지고 인간과 인간의 고리를 잇는 사선마저도 사라져버리고 있다. 마치 인간이 탄생과 소멸사이에서 탈피하여 그들의 존재 조건 자체를 벗어나고자하는 시도로도 보인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종착점을 향해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한 사유에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존재의 뿌리를 잊고 사는 우리들, 한번쯤은 죽음의 강 저편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