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탄생 - 전인권

최근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유해매체물 선정을 두고 보여주는 갈지자 행보가 우리들에게 웃음아닌 웃음을 던져주고 있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간 여성들이 소외되어 온 것이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는 여성가족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간에도 그리 곱지 않아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미 잘못된 오해의 틀 안에서 길러진 남성적 시선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파악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도 이미 그 출발지점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남자의 탄생」은 먼저 이와 같은 시선의 교정을 유도한다. 그렇다고 입에 발린 남녀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든 불평등이든 남자란, 또는 여자란 어떠하다는 식의 상식들이 사실은 사회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고 지켜져 온 일종의 지배담론으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가 말한 유명한 구절인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남성 내지 남성성은 사회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저자는 굳이 기존의 남성학적 인식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실제 경험한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부모님과 형제들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그가 경험한 것들은 그 시절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만한, 사소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건들이다. 예컨대 저자가 기억하는 유년기의 집은 아버지의 공간과 어머니의 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안방은 하나였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가 두 공간을 분리시켰던 것이다. 자식들과 더불어 생활을 해나가는 어머니의 공간은 온갖 생활 용품과 잡동사니로 가득하면서도 감정적인 편안함을 주는 공간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항상 근엄하고 과묵한 아버지의 공간에는 책들과 문서, 서류, 족보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그 당시에는 귀중했던 라디오와 같은 물건들이 아이들 손이 닿지 않도록 보관되어 있었다. 사적 영역을 담당하는 어머니, 공적 영역과 소통하는 이른바 가족의 대표자로서 아버지의 존재가 공간(사회)의 질서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밖에도 가족 내에서 암묵적으로 유지되는 삶의 방식은 얼마든지 더 있다. 밥을 풀 때도 아버지, 장남, 차남, 딸들로 이어지는 순서를 지킨다든가 가족들이 밥을 먹기 위해 둘러앉았을 때 어머니나 딸들의 자리는 심부름하기에 적절한 위치라든가 하는 것들은 저자와 비슷한 연배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었던 일상이다. 이를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관습으로서의 남존여비사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저단위에서부터 단순한 생물학적 지표였던 남자가 사회·문화적인 남성으로 변모될 수 있도록 일종의 교육과정이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 사회에서의 경험은 가부장적 질서와 제도가 속속들이 미치고 있는 영향력을 반증한다.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쏟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 역시 사실은 아들이라는 존재를 통해 가부장제도 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만들고자 하는 생존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도라는 사회구조는 우리 모두를 그 틀에 종속시켜 남자 또는 여자, 남편 또는 아내, 그리고 아들 또는 딸이라는 각각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원천이 된다.
따라서 현실은 더 이상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가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그것을 벗어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한 시대이다. 그럴때만이 가부장제도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나아가 타인과의 연대를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엄친아’와 ‘엄친딸’들에게 괜한 주눅 들 필요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