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인재와 함께 잘 놀아 보세

놀이는 도전, 표현, 즉흥에 바탕을 두고 이것이 문화는 물론 현대의 법률, 과학, 예술을 만드는 근본이 된다.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제 카유아의 저서 「인간, 놀이, 게임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야말로 놀이가 인생의 한 축소판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재미있게 놀기만 한다면 그로써 화려한 인생의 한 장을 장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우리들은 자신을 어른으로 자라게 한 과정에 ‘놀이’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놀이’를 하지 않은 어린이는 없고, 그 ‘놀이’는 우리가 지금껏 성장하는 과정에 늘 함께 해왔다. 사물의 이름을 맞추는 놀이를 하며 말을 배웠고, 팔다리를 맘껏 움직이는 놀이를 하며 튼튼한 신체를 키울 수 있었다. 달리고 뛰며 놀던 중에 넘어지는 아픔도, 일어서는 의지도 스스로 깨우쳤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서 굳은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놀이’와의 절교를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과거의 일이고, 더 이상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믿으며 몸과 마음이 자라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이 땅의 많은 어른들은 더 이상 ‘놀이’에 관심을 가져서도, 놀아서도 안 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놀이’와 분리시켰다. 왜 그래야 하는가. 어째서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그만 놀아야 하는가.

철이 든 어른들은 그저 ‘때가 지났다’고 말한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도,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는 것도, 심지어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도 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놀이처럼 그 ‘때’가 지나면 다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일까. 어른 중에도 아직 그 때를 만나지 못한 이가 있을 수 있는데, 누구의 잣대로 그 ‘때’를 정한 것인지 얄밉기만 하다. 하지만, ‘놀이’가 어른에게 있어서 금지된 장난이라면, 어른들에게 ‘놀이’를 대신해 즐거움을 가져다 줄 무엇이 필요하다. 모든 참가자에게 구리로 된 메달을 주며 참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이야기한 1896년의 근대올림픽처럼 우리에게 ‘과정’의 즐거움을 일깨워줄 그 무엇이 간절하다.

‘놀이’는 이처럼 즐기는 과정 속에 그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는 타인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노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찾아 즐기듯이 일이나 공부도 노는 것처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일이야, 이건 공부야, 하는 딱딱한 생각만으로는 놀이와 같은 과정의 행복을 만들 수 없다. 따라서, 허투루 보내는 잉여의 시간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찾아 즐길 수 있는 ‘놀이’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아주 짧은 한 순간일지라도 진심을 다해 놀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스스로 행복한 ‘노는 인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즐기고 싶고, 즐길 수 있고, 지금 즐기고 있는 ‘놀이’스러운 일이 있다면 더 이상 피하지 말자.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몇 번을 넘어져도 괜찮고, 언제나 탈탈 털고 일어설 수 있다면 말이다. 새 학기, 나만이 스스로 시작하고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자. 더 이상 노는 일이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선을 그어놓고, 지루한 시간 속에 자신을 가둘 필요가 없다. 내가 즐겁고, 그 속에서 자라고,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참다운 ‘놀이’를 만들면 된다. 그저 ‘안돼’라는 말로 가려놓았던 우리 마음 속의 ‘노는 인재’가 지금 막 준비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도 황룡인들이 재미난 놀이시간을 따라 경쟁을 이기는 협동의 놀이판에서 한껏 놀았으면 한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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