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속에 감춰진 100년, 그 이상을 앞선 선각자
나혜석, 내게는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저 그녀의 이름에서 막연히 남성적인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이 책을 찾기 위해 나는 세 곳의 도서관을 찾아 헤매야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난 이 여성은 내게 커다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먼저 만난 그녀는, 정조를 지키지 못한 부도덕하고 퇴폐적인 ‘신여성’으로 비춰졌다. 이전 소설들로 만나보았던 그녀들의 모습도 내게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 일까! 그녀들은 자신들이 ‘신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자유연애를 외치고, 부인이 있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신여성에 대해 이러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그녀의 존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100년이 지난 이 시대에서도 그녀는 우리에게 떠밀림 당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건 때문이긴 하지만, 그녀의 모든 삶 자체가 거부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받는 하나의 차별이라고 말이다.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실감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남녀를 구분하는 부당함에 대해 눈을 떴었다. ‘남녀평등’을 주제로 한 글짓기에는 꼭 참가하여, 내가 받은 부당함에 대해 토로하고, 상을 받았었던 어린 시절 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비하면, 이정도 차별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척박한 땅에서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기 전에 인간임을 자각하고, 다른 여성들을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 유학시절, 그녀는 부당한 이유로 학비 보조를 중단하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여 학업을 계속하는 강단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자의식적인 면모는 3.1운동에도 참여하여 반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고통 또한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녀가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새롭게 다가온 한 남성과 결혼하여 곧바로 아이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예술혼을 놓지 않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럼에도 한 남자의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의 삶도 충실했다. ‘신여성’으로의 자각과 선각자의 모범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는 같은 하늘에 있는 사람이지만,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법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권력을 쫒는 사람과 같이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최고의 가치는 ‘신여성’으로서 선각자로의 자각이었고, 또한 예술이었다. 그러한 자신의 예술적 능력이 소진하자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려고 갈망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악마와의 계약처럼,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 것이다. 결국 아무런 갈증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저평가 되어지는 그녀의 삶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선각자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기던 그 시절에, 편하게 먹고 입고 지낼 수 있는 상황을 마다하고 여성의 인권을 외친 그 담대함, 예술을 향한 그 열정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성이기에 받아야 하는 부당함이 남아있는 이 시대에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나의 고민이 계속되는 한 나혜석, 그녀는 나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