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영화 <피에타>로 보는 물질만능주의의 속죄(학술 가작)
철커덕, 철컥. 공장 한 켠, 휠체어를 탄 창백한 사내가 쇠사슬에 목을 감고는 기계 버튼을 누른다. 기계소리가 그칠 즈음, 불편했던 다리가 비로소 공중에 바로 섰고, 사내는 죽음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 <피에타>에 첫 장면이다.
지독한 사채업자 ‘강도’는 세무자의 돈도 생명도 강탈해간다. 300만원을 빌린 세무자는 한 달 사이에 3000만원의 돈을 빚진다. 은행이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10배나 되는 이자가 불어나 있다. 손바닥만 한 공장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는 노동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으로 보험가입서에 서명을 하고 사채를 빌린다. 그리고 독촉과 함께 찾아오는 ‘강도’의 등장은 곧 그들의 손가락 몇 개와 관절을 앗아간 후, 채무의 족쇄를 풀어준다.
1. 속죄의 카니발.
‘강도’는 특별한 방법으로 돈을 빌린 이들의 ‘죄’를 사한다. 그들의 신체 일부를 짓이기는 ‘벌’을 가하는가하면, 속죄의식을 치르듯 속죄물을 요리하여 집어삼킨다. ‘강도’가 하는 의식은 죄진 자를 자유롭게 하는 신의 모습과 닮아있다. 마치, 너의 ‘죄’는 나에게 구속되었으니, 용서를 빌어 구원을 얻으라는 강폭한 신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틈틈이 창밖으로 보이는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문구는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냐는 이 메시지는 강박에 가깝도록 되풀이된다.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개쓰레기”, “천벌을 받을 놈”이라 불리는 ‘강도’에게 용서해달라며 갑자기 여자가 찾아온다. ‘강도’를 낳아 버렸다고 주장하는 친모의 등장은 ‘강도’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어미에게 용서를 내려야 하는 ‘강도’의 자리는 모든 권능을 얻은 듯하다. 위풍당당한 강도는 나의 어미라면 나의 살을 먹으라며 진정한 회개의 방법이라는 듯 자신의 살을 떼어준다. ‘피’와 ‘살’을 먹으며, 한 몸을 이루게 되니 이들의 ‘카니발’은 완성된 셈이다. 가히, 신약전서의 속죄의식 과정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디오니소스가 ‘피’로 상징되는 포도주를 마시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카니발’은 ‘신’이라 칭해지는 존재와 ‘인간’의 합일을 뜻하는 의식과도 같다. 이처럼 ‘속죄의 카니발’이라 표현할 수 있는 ‘피의 잔치’ 곧 죄사함의 관계는 반복되어 등장한다. 신과 인간, ‘강도’와 ‘엄마’, ‘강도’와 채무자, 신체를 잃은 채무자와 ‘강도’,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강도’. 도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굴레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평행적인 듯 수직적인 이 관계는 ‘죄’와 구원의 한 끝 차이를 되새김질한다. 감독의 의도는 ‘속죄의 카니발’을 기점으로 여자와 강도의 관계를 역전시키는데서 드러난다. 어느 사이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절실하게 믿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강도’에게 여자는 곧 구원자이며, 전부가 된다. 그리고 ‘강도’를 향해 여자는 가장 잔인한 ‘징벌’을 가하기 시작한다. ‘강도’의 ‘죄’ 때문에 여자가 해코지를 당하는가하면 갑자기 납치를 당하기도 하는 여자의 연극은 ‘강도’를 극도로 불안하게 하며, 고통스럽게 한다. ‘강도’는 몸부림치며 누군가를 향해 외쳐댄다. “엄마는 아무 잘못이 없어. 차라리 나를 죽여.” 이제는 가장 약자의 모습이 된 ‘강도’의 모습은 불완전한 인간은 결국 ‘죄’를 사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다시 보이는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라.’는 결국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2. 신의 권좌를 차지한 ‘돈’
“돈,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여자의 대사는 돈의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성경에서 신은‘알파와 오메가.’라고 표현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의 시작과 끝. 세상을 창조한 것과 동시에 세상을 말세로 이끌기도 하는 존재가 신이다. 어느 사이 신의 권좌를 차지한 ‘돈’은 도대체 인간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 종교적 상징 언어를 통해 전하는 김기덕 감독의 메시지는 물질만능주의 세태에 일침을 가한다. ‘돈’이 사회를 군림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돈’은 유령처럼 인간사회를 배회하며 ‘증오’와 ‘복수’의 씨앗을 뿌린다.
행복과 불행을 구분 짓는 경계가 ‘돈’이며, 누군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게 하는 것도 ‘돈’이다. 결국, 돈이 갖고 있는 권력은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돈’은 악랄한 교환을 제시한다. 보험금으로 표상되는 ‘돈’과 ‘죽음’의 교환관계는 ‘돈’과 ‘행복’의 극단적인 교환가치를 제시한다. 곧,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으니, 죽음으로 ‘돈’을 얻겠다는 아이러니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참상인 것이다. 이렇듯, ‘돈’을 전지전능한 위치에 놓고 숭상하는 물질만능주의는 돈으로 행복을 사길 바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다만, ‘돈’이 ‘증오’와 ‘복수’로 변화되는 양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강도’에 의해 불구가 된 육체를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증오’뿐이었고, 그 ‘증오’는 누군가를 파괴하여야 끝이 나는 파멸을 보여준다. ‘강도’에게 팔과 다리를 잃은 이들은 ‘증오’의 마음을 품고는 ‘복수’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가 하면 ‘강도’에게 돈을 갚는 것 대신에 자살을 택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영화는 계속해서 ‘돈이 뭔가?’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결국, 그 까짓것이 무엇이길래, 인간은 돈을 위해 살아가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행복’도 살 수 없으며, ‘돈’은 누군가를 용서하게 하지도 않고, 더구나 사랑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겨우 ‘돈’이 생산하는 것이라고는 증오와 복수 그리고 죽음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돈’의 실체는 형편없다. 결국, 신의 권좌에서 전지전능한 힘을 행사하는 ‘돈’의 실체는 허상인 것이다.
3.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에 하나인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Komm, Süsser Tod]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가는 신을 향한 찬양곡으로 작곡되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으로 걸어가는 초연한 발걸음과 비장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는 영화<에반게리온 - End Of Evangelion, 1997>에서 인류가 종말하는 순간에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다시 재탄생되었다.
영화 <피에타>에서 인물들이 향하는 발걸음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목에 쇠사슬을 매달고 자살을 택했던 노동자 ‘상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이자에 대한 압박과 돈 때문에 신체를 포기하는 회의에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 ‘강도’에게 친어미 행사를 하며 가장 잔인한 벌을 가했던 여자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임무를 마치고 자살한다. 또한, ‘돈’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자살을 하는 청계천의 노동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모두 ‘돈’에 대한 굴레를 벗어나려는 탈출구로 죽음을 선택한다. 끊을 수 없는 ‘돈’의 노예로 살아가야하는 운명에서 벗어나 순순히 죽는 그들의 초연한 모습은 오히려 홀가분하고 평안한 느낌마저 준다.
또한, ‘강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신과 같이 스스로 죽음으로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물론, ‘강도’ 본인의 악행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만 역시나 신과 닮아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강도’는 잔인하게 일삼았던 악행의 죗값을 받듯이, 또는 ‘돈’이 세상에 행했던 ‘죄’를 짊어지고 죽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트럭 밑에 쇠사슬로 몸을 묶으며 죽음을 택한다. ‘돈’에서 시작된 비극의 역사가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은 이렇듯 쓸쓸하다. 오히려, ‘증오’와 ‘복수’로 이어지는 죽음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은 듯하다. 물질만능주의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피에타>는 말하는 것이다. ‘죽음’으로 속죄의식을 치르듯 물질만능주의의 속죄를 위해 말할 수밖에,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