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죄와 벌>을 읽고 :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우리나라는 이번 년도도 어김없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은 경쟁과 물질주의로 얼룩진 대한민국에선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소나 돼지처럼 등급이 매겨졌고, 같이 공부하는 반 친구는 곧 경쟁자가 되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책상에 앉아 기계처럼 공부만 했다. 그렇게 노력해 원하던 대학에 왔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대외활동, 토익, 해외연수, 인턴 등 과도한 스펙 경쟁에 더욱 숨 쉴 틈이 없다. 어딜 가도 내가 제일 뒤처지는 것만 같고 이미 학벌 경쟁에 밀려난 것 같아 불안해한다. 취업에 성공한다 한들, 잦은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 속에서 열심히 한다고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평생을 달려오며 가정도 꾸려갔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아무도 찾지 않는 ‘퇴물’로 전락해버린다. 삶의 끝이 ‘고독사’라면 그 누가 그렇게 열심히 살겠는가. 이 이야기가 너무 일반화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들이다.

 최근 나는 <신과 함께-죄와 벌>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의 설정은 ‘모든 인간은 사후 49일 동안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이라는 7개의 지옥의 재판에서 무사히 통과해야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전직 소방관으로 아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주인공 ‘김자홍’은 정의로운 망자, 귀인이라 불리며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인생을 나태하게 살아온 자를 벌하는 곳인 나태지옥에서 김자홍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것이 다 돈 때문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에게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노모가 있었다. 노모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그는 낮에는 소방관 일을 했고, 저녁에는 부업으로 고깃집, 대리운전 등의 일을 전전하였던 것이다. 그런 김자홍이 비로소 쉴 수 있었던 시간은 죽어서였다. 죽어서나마 ‘돈’이라는 신에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그렇게 악착같이 성공하고 싶었던 이유도 결국엔 돈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나중에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 행복의 주체가 자신이든 아니던 사람들은 나중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렇다면 ‘당신이 내일 죽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아마 여러 생각이 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거나 못 가본 여행을 떠나거나 그게 뭐든 마지막 하루를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에 반해 뭘 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 하루를 허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자신이 뭘 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인지 잊은 것은 아닐까. 그것보다 앞서서 질문하고 싶다. 살면서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사는 게 아니라 그저 버텨온 것뿐만은 아니었는지.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에 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 현실에 적응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난 지금 가능한 행복을 ‘나중에’로 미루지 말라고,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나중은 없다고 더 많은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성공과 행복이 같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고민만 하지 말고 하루 정도는 실천해보자.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처럼, 한번 사는 인생 내일 죽어도 후회 없을 것 같은 인생을 살자. 남의 인생도 아니고 나의 인생이니까 말이다. 왜 이런 시 구절도 있지 않은가,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