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 철도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왜가리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독(毒)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 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륜의 끊임없는 바퀴와 익숙한 체중을 못 잊어하는 옥수수밭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아이들의 뜨듯한 가랭이 같은 아직도 귀대면
중무장한 병사의 씩씩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오래도록 남아서
태업한 꿈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년대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는

철길 위를 걸어본 적 있으십니까. 가로로 촘촘히 깔린 침목 위에 길게 뻗어 있는 두 갈래의 철길은, 저 멀리 시야 끝 소실점에서는 서로 맞닿은 듯이 보여도, 영원한 평행을 이루고 있지요. 흔히 영원히 만나지 못하거나 어긋나는 감정을 표현할 때, 철길의 비유를 끌어들이곤 합니다. 무작정 열차를 집어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감정이 들기도 한다는 점에서, 철길은 이래저래 낭만적입니다.
제목이 ?수인선 철도?인데요. 수인선 철도는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 열차가 운행되었던, 수원과 인천 사이에 놓인 협궤철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수원, 군자, 소래, 남동역 등으로 연결되어 협궤열차가 다녔었는데, 이제는 운행이 중지된 채 기념물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수인선 철도의 역사에 대해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철길 위를 걸어본 경험 정도만으로도 이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되겠네요. 우리도 화자처럼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걸으면서”, 그렇게 왔다 가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추억해 볼 일입니다.
우리들 삶 속에서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라고 떠올릴 만한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뿐인가요. 이 시에서 첫 행에 있는 왜가리, 갈대, 북서풍, 청둥오리 등과 같이 계절과 관계된 것들로부터, 마지막 행에 있는 70년대,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할 것입니다. 이 시는 각 구절들의 전후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리 간단치 않은데요. 사실 이 작품은 전후 맥락의 파악에 집중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는 이미지들이 환기하는 분위기나 정서에 집중하는 시읽기가 더 효과적입니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걷는 철길은 마치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에서, 남긴 빵이나 헝클어진 머리 같은 추억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추억은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도 하고, 불륜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뜨듯한 가랭이 같은 느낌이기도 하며, 중무장한 병사의 씩씩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오래도록 남아 있기도 하답니다. 이 시는 그렇게 왔다 가는 이러저러한 장면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 감촉이 느껴지듯, 귀에 들리듯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마지막 구절에 “70년대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70년대는, 경제 개발에 집중하다보니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던 우리 현대사의 한 년대이지요. 배호는 지난 60-70년대초까지 활동했던 전설적인 트로트 가수이구요. 김종삼 역시 당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후 예술파 시인의 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의 ‘너’는, 아마 화자가 떠나보낸 사람이며, 어쩌면 수인선 철도에서 협궤열차를 함께 탔던 추억의 상대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품 이해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수인선 철도에 대해 좀더 부연하는 것도 좋을 듯 싶네요. 수인선 철도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1937년에 소금 수탈을 위해 일제가 개통했었고, 6.25때 소래 철교에서 많은 사상자가 있었으며, 지난 70년대 경제개발 시대에 융성했다가, 점차 그 운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이 미미해져서, 90년대 중반 마침내 운행이 중단된 역사가 있지요.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는 열차 운행이 중단되기 이전이었는데, 지금은 수인선 철도 역시 공교롭게도 “그렇게 왔다가는” 대상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80년대 이전의 남인천역과 수원역을 통과했던 그당시 학생들과 상인들의 추억과 낭만이 서려 있는 이곳에는 지금도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보려는 듯 소래 철교를 찾는 이가 많다. 그러나 추락위험이 많은 이유로 철도청에서는 통행을 금지시켰고, 이것마저 여의치 않자 96년 6월에는 교각을 철거한다는 내용으로 한 공문을 남동구청에 보내왔다. 이에 따라 우리 남동구에서는 5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완벽하게 보수하고 안심하고 통행할 수 있도록 소래철교 정비공사를 실시하여 남동구의 영원한 추억의 명소로 보존시켰다.
1930년대 말 수인선 협궤열차의 개통목적은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소래염전, 주안염전, 군자염전 등에서 생산되는 소금(천일염)을 대동아 전쟁당시 화약제조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수송수단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해방후에는 남인천역에서 수원역까지 상인, 학생들의 교통수단으로 주로 이용되어 왔다.

1970년대 불어온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국민소득이 향상되고 이곳 소래포구가 관광어촌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한때에는 하루 왕복 10회를 운행하였으며, 1일 이용객수도 1~2만명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남인천역과 수원역에서는 열차시간에 맞추어 반짝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
특히, 6.25사변중에는 이 곳 소래철교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다 희생자를 ㄹ남긴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후 서울근교의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서 터덜대던 협궤열차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인수 산업도로, 서해안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기능을 잃어버린 꼬마열차는 지난 95년 12월 추억만을 남긴채 그 자취를 감춰버렸고 지금은 그시절 어려웠던 때를 회상하면서 찾는 이만 있을 뿐이다.

※남동구청에서는 강원도 대관령 휴게소에 전시되 있던 협궤용 증기기관차를 2001년 11월 남동구로 이전해 와서 현재 구청앞 담방문화근린공원에 전시하여 많은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