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족(濯足)

    탁족(濯足)
                                                                                                          황동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梧田)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입을 때
흔들어봐도 안 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넣고 걷다보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지겹게 지니고 다닌다는 생각!
?
시냇가에 앉아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다.
팔과 종아리에 이틀내 모기들이 수놓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화끈한 문신(文身)들!
인간의 손이 쳐서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다.
요만한 자국도 없이
인간이 제 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디지털 시대가 낳은 문명의 기기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휴대폰은 특히 꼭 필요한 물건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어쩌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혹은 잘 터지지 않는 지역에 있기라도 하면 온종일 괜히 안절부절못하기도 합니다. 때로 과감하게 휴대폰을 버리면, 우리들의 삶이 더 여유로워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그래서 “휴대폰 안 터지는 곳”이 오히려 살갑다는 상상력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곳에 있다고 합니다.(‘슴슴한’은 ‘심심한’의 방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안 터지는 휴대폰이 계기가 되어 “면허증 신분증 카드 수첩 명함 휴대폰 / 그리고 잊어버린 교통 범칙금 고지서까지” 주머니에 지겹게 넣고 다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제목의 ?탁족?은 2연에서 이루어집니다. 탁족(濯足)이란 말뜻 그대로는 발을 씻는다는 뜻이지만, 중국의 고전인 ?초사(楚辭)?에 나오는 구절로서, 번잡한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자연에 순응하며 초연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화자가 “구두와 양말 벗고 바지를 걷는” 것도, 단순히 발을 씻는 행위 이상의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동안 “지겹게 지니고 다닌” 것들을 내려놓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도한다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신”을 발견합니다. 물론 이 문신은 실제의 문신이 아니라 모기가 문 자국을 말하는데요, 시적 상상력에 의하면 모기가 문 자국은 “생물과 생물이 느닷없이 만나 새긴 / 화끈한 문신(文身)들”이랍니다. 사람도 생물이고 모기도 생물이니, 모기가 문 자국은 과연 생물과 생물이 만나 새긴 “문신”이지요. 물론 모기가 그렇게 문신을 새기려 하는 순간, “인간의 손이 쳐서 / 채 완성 못 본 문신”도 있겠지요.
이 작품의 가장 의미 있는 인식은 마지막 두 행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그 정도의 모기 자국조차 없다면, 과연 “인간이 제풀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라는 반문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너나없이 문명의 일상 속에 함몰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이처럼 거기서 잠깐 물러나 자신과 주변을 바라볼 때, 비로소 삶과 세계는 새로워질 수 있나 봅니다.
강연호(시인, 원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