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보다 무서운 자본, <화차>

영화 <화차>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사회파 추리 소설이라고 불린다.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증상에 가깝다. 살인이나 사기를 저지르는 주체는 분명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을 살인이라는 행위까지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돈으로 움직이는 사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 사회 말이다.

   
 
이런 식이다. 35만원의 카드 연체료를 갚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현금 서비스에 의존을 한다. 한 달, 두 달 근근이 돌려 막다 사채에 손을 뻗는 순간, 원금과 이자의 크기가 역전된다. 아무리 갚아도 줄어들지 않는 빚은 결국 범죄로 이어진다. 선한 의도나 인성은 두 번 째 문제이다. 돈은 한 사람을 인형처럼 끌고 다닌다. 이미 시작된 후엔 원하든 그렇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순간, 이미 운명의 수레는 내리막길에서 굴러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일본 소설 원작을 살펴볼 때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대한 민국의 현실과 무척 닮았다는 점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이미 십 여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지만 소설 속 일어나는 상황들은 지금, 이 곳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신용불량자, 카드연체 추심, 연대보증과 같은 단어들, 어느 새 이 단어들은 우리 문화 안에서 낯설지 않다. 장기적인 복합 불황의 현실, 자본의 악순환은 소설 속 <화차>의 현실과 지독하리만큼 닮아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곳에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불수레는 바로 돈, 신용 사회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의 폭력이니 말이다.
대개 한국 영화에서는 빚을 진자가 아니라 추심을 하는 조직 폭력배가 주인공으로 설정되곤 했다. 조직 폭력배의 대명사쯤으로 추심꾼이 등장해왔던 것이다. ??카운트다운??이나 ??우아한 세계??, ??똥파리??, ??내 깡패같은 애인??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그렇다. 성공한 조직 폭력배가 얼핏 비즈니스맨처럼 군다면 영화 속 실패한 조직 폭력배는 불법 추심꾼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추심을 당하고 괴롭힘 당하는 이들은 어떤 배역을 맡았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  그들은 대개 이름없는 엑스트라나 조연으로 등장하니 말이다.
이러한 관습적 반복은 한국 관객들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적어도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스스로 불법 추심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경제 시장 안에서 적어도 자신만큼은 자본의 화차에 올라타지 않으리라 자신하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안도감 덕분에 빚을 진 자들과의 연루는 피해왔다. 말하자면, 사채나 빚은 남의 문제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에 결부된 문제이지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셈이다.
하지만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이 문제가 결코 개인의 선택이나 도덕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감독이 그려낸 빚을 지게 되는 이유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난다. 영화 속 인물 중 하나는 지나친 씀씀이 때문에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인물은 아버지가 쓴 사채를 물려받는 바람에 불법 추심꾼에게 일상생활마저 차압당한다. 그는 돈을 빌린 적도, 쓴 적도 없다. 다만 법적으로 채무를 상속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유산처럼 빚을 물려 받았을 뿐이다.
무서운 사실은 영화 속 주인공의 현실이 더 이상 우리와 먼, 가공의 허구로만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취직을 하지 못해 학자금 대출을 빚으로 떠 안고 살아가는 장기 실업자들, 내 집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모기지론에 허덕이는 가정들, <화차>는 비록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모두에게 개연성 있는 일이다. 만일 <화차>가 공포스럽다면 이는 그 개연성에서 비롯된 두려움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이미 그 자체가 화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