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식(月蝕)
월식(月蝕)
김명수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월식’은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는 자연현상입니다. 월식이나 일식과 같은 천체의 변화는 초등학교 수준의 과학으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그것을 신비롭게 생각하거나 한편으로 두렵게 여기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또한 오늘날 아무리 과학적인 해명이 가능해졌다고 하더라도, 해나 달이 잠시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진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과학적 해명이야말로 환상적인 상상력의 전개를 가로막는 요인일 것입니다.
「월식」은 지극히 짧고 단순한 시행들을 잠깐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순식간에 읽히지 않습니다. 느릿느릿 행간과 여백을 다 짚어가며 시행 곳곳에 담긴 의미의 파장을 음미해야 비로소 그 묘미가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표면적인 진술만을 따라가면 어느 마을에 한 사나이가 잠시 머물다 간 모양이고, 그 뒤로 누님은 왠지 말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월식 현상이 일어났던 밤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 배경에 깔려 있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읽어가며 채워야겠지요.
작품의 정황은 이처럼 확실하지 않지만, “발자국 성큼 / 성큼”의 행갈이는 사나이가 누님의 내면에 찍어놓은 발자국의 충격과 여운을 강조해줍니다. 즉 사나이와 누님 사이에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도 늘 외로움을 타던 누님은 그 뒤로 더욱 말이 없게 됩니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도 다시는 짖지 않게 되었답니다.
사나이와 누님, 즉 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이 추정은 월식 현상이 있던 밤의 어둠과, “붉게 물들어”나 “커다랗게 / 불끈 솟은 달” 등의 구절이 주는 암시와 더불어 상당히 은밀하고 에로틱한 느낌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사나이와 누님 사이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일일이 자세히 설명하는 사건의 전말보다 더 많은 정황을 추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월식 현상이 일어난 밤의 몽환적이고 에로틱하기까지 한 어떤 분위기로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월식, 달이 먹힌 현상이자 누님의 내면에 사나이가 깊숙이 들어앉게 된 사연일 것입니다. 시는 과연 다 말하지 않지만, 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예술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