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속에 보이는 군산 사람들의 삶과 죽음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군산에 무엇을 남겼을까? 지금부터 청동기시대의 이 곳 사람들이 남긴 옛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보자.
군산지역의 신석기시대는 대부분 해안가나 인근 섬들에 형성된 조개무지를 통해 그 시대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조개무지는 신석기시대 뿐 아니라 청동기시대까지도 층층이 쌓이고 쌓여 바다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해주고 있었다.
신석시시대와 달리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보다 육지 쪽으로 들어와 집자리와 무덤 등 적지않은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이 시기 사람들은 주로 볕이 잘드는 나지막한 구릉 기슭에 움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개정면 아동리, 성산면 도암리·고봉리, 서수면 관원리·축산리 등에 자리하고 있다. 고고학에서 송국리형 주거지로 분류된 평면형태가 동그란 움집은 3~4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중앙에 돼지코 모양의 기둥구멍 자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집자리에서는 무문토기와 화살촉과 같은 간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군산에 남아있는 청동기시대 무덤유적은 고인돌, 돌널무덤 그리고 독무덤으로 구분된다.   고인돌은 땅 위에 커다란 돌을 얹어놓는 매장 방법의 특성상 일반인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지금 군산 지역에는 10여 곳에 무리지어 있거나 홀로 남아있으나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산지역의 고인돌은 커다란 상석 아래 굄돌(지석)이 있는 것과 굄돌없이 상석만 있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여방리에는 규모가 비교적 큰 고인돌이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오성산 기슭에 자리한 고인돌은 군산에서 가장 크다. 나운동 아파트 단지와 미제지 사이의 근린공원 한 쪽에는 고인돌 상석으로 보이는 커다랗고 두꺼운 돌들이 산처럼 켜켜이 쌓여 있어 아이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놀이공간이다. 그 주변에는 애기바위, 장군바위라 이름붙여진고인돌 상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은 아파트단지를 위한 택지개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전마을 지석묘군’으로 불리던 많은 지석묘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채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어느 초등학교 입구의 교명을 새겨넣은 커다란 돌이 고인돌 상석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이와같이 소중한 문화재가 더 이상 없어지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청동기시대 무덤유적 중 돌널무덤과 독무덤은 고인돌과 달리 땅 위에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발굴조사에 의해 알려졌다. 우리 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아동리 유적은 군산지역의 돌널무덤과 옹관묘의 존재를 처음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봉리와 축산리에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돌널무덤은 땅을 판 후 얇고 네모난 여러 장의 돌을 세워 관 모양으로 만든 무덤으로 딱 한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뚜껑 역시 여러 장의 얇은 돌을 덮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정성껏 만든 간돌검, 간돌촉과 같은 껴묻거리를 넣어주었다. 돌널무덤은 대부분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군집 사이에 독널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독널무덤은 옹관묘라고도 불리는데, 땅을 판 후 독을 세워 넣고 그 위에 돌을 덮는 형태이다. 50㎝ 남짓한 크기의 독은 어린아이를 위한 무덤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동리유적에서 출토된 독널은 바닥 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이는 독 안의 물 또는 습기 제거를 위한 시설로 생각되는데, 세심함이 엿보인다. 아동리유적은 5기의 돌널무덤 사이에 1기의 독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모두는 가족과 같은 관계 집단의 무덤군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군산의 청동기시대 유적을 통해 볼 때 치열했을 삶 속에서도 죽음에 대한 예의는 매우 뚜렷했었던 것 같다. 특히 돌널무덤 사이사이 독널을 배치하면서 아이의 죽음도 배려하고자 했던 그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오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