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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향한 두 개의 문, 그 문을 열기위한 열쇠의 향방은?

제33회 황룡학술문학상 학술부문 가작

- 10분 걸림 -

변혁을 향한 두 개의 문, 그 문을 열기위한 열쇠의 향방은?

‘권력을 향한 전진’과 ‘새로운 이상향 추구’의 대립을 중심으로

영화 <설국열차>에 담긴 메시지는 많다. 그러나 분명하다. 설국을 달리는 열차를 중심으로, 외부에서는 극단적인 빙하현상(지구 온난화 해결이 초래한)을, 내부에서는 계급투쟁의 굴레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 예를 들면 철저한 사상 교육, 독재와 인종차별 등 많은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 많은 주제들은 ‘권력을 향한 전진’을 바탕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이상향 추구’가 영화 말미에 언급되면서 이 둘은 첨예한 대립 구조를 띠게 되는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철저한 관찰자적 시점에서 무엇이 타당한지 생각의 여지를 준다.

이 같은 갈등양상은 두 주인공을 통해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며,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약 갈등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지녔다면 누구에게 건네줄 것인가?’

 

권력을 향한 열쇠

열차의 운영체제를 이루는 계급구조에서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존재한다. 피지배계층에서도 권력자를 지배하기 위한 지도자가 존재한다. 지도자 커티스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타파하기 위해 새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 그것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그가 향하는 곳도 권력자가 있는 열차의 앞 칸이다.

권력을 향한 과정은 참혹하고도 비참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은 물론 잔혹하게 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폭력vs폭력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계급사회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에 투쟁이 필연적이다. 소수층의 부유한 특권과 다수층의 권리 상실은 계급 사회의 모순된 세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커티스가 생활했던 꼬리칸은 단 몇 칸뿐이었지만 꼬리칸에서 벗어날수록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머리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열차의 구조상에서도 계급사회의 빈부격차를 볼 수 있으며 때문에 커티스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되는 투쟁을 자신의 운명인 것 마냥 받아들인다. 각박하기만 했던 꼬리칸과 풍족한 머리칸의 상반됨을 커티스의 시선과 함께 따라가는 관객들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투쟁을 선동하기까지 커티스에게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불합리한 시스템을 ‘그대로 감수할 것인가’ 혹은 ‘변화시킬 것인가’는 성숙된 시민의식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무지한 상태에 있던 과거의 커티스는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비탄하며 동족끼리 서로 물고 뜯기는 골육상잔의 비극을 겪게 된다. 이러한 그가 열차 안 부조리한 모순을 알게 되기까지는 성숙된 의식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꼬리칸 사람들은 하나로 단결될 수 있었으며, 정당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투쟁을 선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모든 변화에는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와 의식이 필요하다.

오로지 권력의 지배와 변화를 위해 머리칸까지 전진하는 커티스의 모습은 설국을 달리는 열차와도 비슷하다. 그렇게도 원망했던 열차와 커티스가 닮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커티스가 계급구조의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권력을 지배하려는 모습 자체가 결국 또 하나의 계급구조를 양산해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투쟁이 평등한 체제를 만들기 위함일지라도, 열차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균형을 이뤄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인구 수 조절이 필연적이라는 윌포드(권력자)의 논리에 커티스는 흔들리는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자신이 투쟁을 위해 치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도 결국 열차의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한 윌포드의 계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상향을 향한 열쇠

남궁민수가 바라던 이상향은 앞이 아니라 바깥세계였다. 오로지 기차가 세계라고 믿는 열차 사람들에게 눈 덮인 세상으로의 탈출은 새로운 혁명의 제시인 것이다.

남궁민수가 중독돼있던 약물 크로놀은 바깥문을 열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다. 통상적으로 마약은 반항, 저항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부조리한 계급사회로부터의 탈출과도 상통하다. 진정 부조리한 계급구조에 저항하는 것은 권력 지배가 아닌 열차 밖으로의 탈출이라고 말하고 있다.

커티스와 그의 일행들이 지배계급을 향해 피 튀기는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남궁민수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투쟁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바깥을 향하는 문만 갈구할 뿐이다. 자신의 딸 요나에게 바깥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려다 얼어 죽은 일명 ‘7인의 반란’을 설명해주는 영화 속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외에도 열차가 건너는 다리 밑, 눈에 파묻힌 비행기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것을 보고 눈이 녹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이때 감독은 남궁민수의 시선을 빌려 다리 밑 비행기의 모습을 주시할 수 있도록 영상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열차 바깥으로의 탈출’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준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장면 또한 따뜻한 햇살과 함께 매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투쟁에 전념할 때 남궁민수는 새로운 희망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었다.

희망을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예는 북극곰이다. 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바깥세상으로 나가 마주했던 그것. 감독은 바깥세상이 생물이 살 수 있는 생태계로 변화하고 있음을 북극곰을 통해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열차 밖으로 나온 것은 땅을 생전 처음 밟아 본 아이 둘 뿐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의 희생은 미래로 상징되는 아이들을 살렸다. 무지한 상태의 아이들이 이제부터 어떤 미래를 열어갈 것인지는 이제 관객들의 몫이다.

‘새로운 이상향 추구’는 남궁민수 홀로 주장하고 있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 비록 영화에서는 열차 바깥으로 탈출했다지만 현실적으로 이상사회를 이루는 데는 모든 시민들의 의지와 행동이 앞서야 할 것이다.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대립은 권력지배VS이상향 추구, 전진VS탈출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주인공의 만남도 문을 따는 열쇠로 이어졌지만 열쇠가 향하고자 했던 방향은 서로 달랐다. 권력을 지배하는 앞문을 열 것인가, 새로운 이상향을 위한 바깥문을 열 것인가, 여기서 열차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를, 바깥세상은 아무도 내다보지 못하는 미래를 의미한다. 이를 새롭게 정의하자면 현재와 미래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이 두 주인공의 갈등은 끝끝내 좁히지 못한 채 열차가 파괴되면서 일단락된다. 열차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관객들로 하여금 통쾌함을 주는 한편 사라져버리는 두 주인공의 모습에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주인공의 대립에도 분명 공통점은 존재한다. 부당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목표는 달랐지만 불합리한 계급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했음은 일치했다.

설국열차는 또 하나의 세계를 열차로 표현했다는 것이 영화의 구조와 스토리에 적합했다. 쉼 없이 달리는 열차는 긴장감을 더하고 수직으로 된 기차는 계급 구조를 잘 나타낸다. 또한 지구온난화, 사상교육, 인간의 잔혹함 등 무겁고도 묵직한 사회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부당한 세계였던 설국열차를 파멸시킴으로써 사회의 필요악임을 말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분명 공상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공상영화와는 다르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 안에 사회현실적인 문제와 투쟁,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낸 영화다.

그렇다면 끝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한 두 주인공의 의견 중 무엇이 옳은 것일까?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끈 ‘권력을 향한 전진’인가? 결과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새로운 이상향을 향한 추구’인가? 이에 대한 답은 영화 설국열차를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엇이 옳든지 그 선택의 몫은 이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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