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 전석순
민음사(2011)
민음사(2011)
2011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전석순의『철수 사용 설명서』는 꽤나 영리한 소설이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자본주의적 현실의 비인간성이나 소위 ‘88만원 세대’를 다룬 소설들과 정확히 같은 지점에 서 있으면서도 작가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철수’다. 고유명사로서 자신 이름의 가치를 잃는 대신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곳에 이르기까지 ‘홍길동’과 1, 2위를 다투며 고군분투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 바로 그 철수 말이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그간 소문으로만 떠돌던 철수에 대해 키, 학력, 몸무게 등등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철수의 유년 시절에 벌어졌던 여러 일들이나 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연애사 등 철수만의 내밀한 일들을 알아 나갈수록 철수가 당면한 문제, 그리고 내가 하루하루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점점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상대방과 나를 잘 안다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은 현실에서 더 이상 충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식 사고와 삶의 태도가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여진 현실에서 사실상 ‘나’와 ‘너’의 관계는 상업적인 관계 속에서 재편된지 이미 오래다. 단순하게 예를 든다면, 여성인 ‘너’의 마음을 잘 아는 ‘나’가 ‘너’를 위해 ‘여성전용 대출상품’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어느 대기업의 광고대로 우리는 심지어 ‘또 하나의 가족’을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유효한 내에서만 작동하는 위태로운 관계일 뿐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위태로움’은 극복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상업적 관계의 나와 너, 최근 각광받고 있는(?) 단어로 다시 말하자면 ‘갑’과 ‘을’의 관계 속에 영구적으로 위치한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과거에는 없었던 또 하나의 위태로움을 추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나의 지불능력을 어떻게든 지속시켜 ‘갑’과의 관계를 최대한 이어나감으로써 위태로움이 현실의 삶을 뒤덮어 버리는 시기를 유예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삶의 방식은 평균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혜택으로 여겨지고 심지어 추천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기업이 최근 또 한편의 광고를 통해서 ‘갑’과의 유효관계가 지난 뒤에도 또는 ‘갑’의 소속이 아니어도, 모든 사람들을 ‘을’의 관계로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관계에서 어긋난 자들은 폐기 처분 대상인 ‘불량품’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이와 같은 현실 속의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 철수 고유의 기능을 살린 정당한 사용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 적어가는 내용으로 빼곡하다. 이 작품의 목차 그대로 “취업 모드, 학습 모드, 연애 모드, 가족 모드” 등의 각종 사용 환경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거치고, “설치 방법, 청소 방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용례들을 통해 얻어 낸 뒤 “제품보증서”까지 갖춘 이 ‘설명서’를 통해 ‘철수’는 남이 자신에게 멋대로 붙인 ‘불량품’의 이름을 벗어나고자 하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는 물론, 소설 속에서도 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목표는 그럴수록 철수‘들’에게 “앞으로도 끊임없이 완성해 나가야 할 사용 설명서”(220쪽)를 작성해나가는 원동력인 동시에, 작가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이야기 방식과 성실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철수 사용 설명서』의 이야기 그 자체는 ‘설명서’가 출발한 지점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따라서 자칫 이 작품은 철수들, 내지는 철수 세대의 이야기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철수’라는 특수상황에 대한 설명서로만 읽힐 우려가 있다. 우리들이 이 ‘설명서’를 작가의 의도대로, 각종 모드들로 분화된 현실에 대한 저항력을 기르는 테스트이자 수많은 주의사항을 스스로 거쳐야 하는 제련(製鍊)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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