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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권 분쟁의 씨앗은 근대국가가 주권 범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세세하게 주변국과 합의를 하지 못한데 있다. 분쟁의 소지가 있는 지역이나 영유권 인식을 각각 달리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경우 이 문제는 국가간 분쟁으로 확대될 잠재성을 띠게 된다. 논쟁의 단계에서 분쟁의 단계로 격화되는 계기는 해당 문제를 둘러싸고 일방 혹은 쌍방에 정치적 위신이 손상을 입을 때 나타난다.
동아시아 3국의 영유권 문제는 과거 일본제국의 팽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역사인식문제와 얽힌 ‘근본적인(fundamental)’ 속성을 갖고 있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적배타수역을 둘러싼 갈등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일 이후의 관계를 생각하면 한반도 북방의 영토 영유권 문제도 그 발단이 근대 시기에 있는 만큼 외교적 해결이 곤란한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도 외교적으로 ‘관리 가능한(manageable)' 문제임이 분명하다.
만약 어느 국가라도 외교적 협력을 국내문제보다 중시한다고 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영유권 문제가 국내 여론에서 비등하지 않도록 조정할 수 있다. 오늘날 영유권 문제가 동아시아에서 뜨거워지고 있는 것은 이 문제가 근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각국이 국내 정치적 입지를 외교적 협력보다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장기적으로도 외교적 관리가 되지 않고 파국(ruin)에 이르게 될 것으로 판단한다면 어느 국가도 이 문제가 풍파를 일으키도록 방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竹島) 문제의 발단은 1905년 2월 일본이 러일전쟁 과정에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한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의 지방 수산업자가 독도에서 강치 등의 어로의 독점권을 얻기 위해 일본정부에 외교 교섭을 요청했는데 결국 일본은 대한제국에 통지하지 않은 채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국의 관할권에 귀속시킨 것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한국은 일관되게 독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국제적으로 배타적 영유권을 승인받는데 실패했다. 한국이 전쟁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조약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해 오고 있는 센카쿠열도는 그 발단에 대해 일본과 중국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일본측은 1885년 오키나와현이 이 섬들을 조사하기 전까지 어느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고 1895년 1월에 기념비를 세워 일본의 공식 영토임을 선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측은 이 섬들이 1895년 5월 청일전쟁 패배에 따른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대만과 함께 일본의 영토로 귀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패전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이 섬들을 포함하여 오키나와가 미국의 관할권에 귀속될 때 국제냉전의 영향으로 대만이나 중국 모두 이 조약에 참가하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 이 섬들 부근의 해저에 막대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국제적 영유권 분쟁 지역이 되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암초 이어도(중국명 쑤엔자오 蘇岩礁)에는 1951년 한국해군과 등산협회가 ‘대한민국 영토 이어도’라고 하는 기념비를 설치했고 그 이듬해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여 이어도 해역을 영해에 포함시켰다. 그 후에도 한국이 1970년 그 해역을 수중자원개발 해역에 포함시키는가 하면 1987년 암초에 등대를 설치하고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쳐서는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했다. 1982년에 체결되어 한국과 중국이 모두 비준한 유엔해양법조약에 의하면 이어도는 암초로서 영토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간선이 배타적경제수역 경계가 되는 까닭에 이어도 해역은 한국측 수역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인공시설물 설치에는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 그런데 중국측은 이 암초가 자국의 대륙붕 연장 수역에 속한다고 하며 한국측의 경제수역 주장이나 인공시설물 설치에 반대하고 있다.
3국의 정치가들은 영유권 분쟁이 결코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최종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국 언론이나 국민들을 향해 쉽사리 ‘자제’를 호소하지 못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유권 분쟁으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각국 사이의 '경계인‘들이다. 영유권 분쟁은 인적 물적 상호교류를 위축시키고 관광이나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세계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이 세계경제의 2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으로 올해 일본의 대중국 수출액 감소가 1조엔(약 15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중국에 진출한 일본기업들이 중국인들의 반일 시위로부터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거나 다른 국가로 이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일본과 중국에 비하면 영유권 문제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일본 손님들을 상대로 하여 관광업과 서비스업을 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업소 관계자는 원래 경기침체에다가 설상가상 경기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영유권 분쟁으로 인한 피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무수하게 많다. 한류와 같은 문화의 국제적 흐름이 약화되기도 하며 재일동포나 재중동포와 같은 경계인 거주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당하는 일이 많다. 반면에 영유권 분쟁에서 이득을 보는 세력은 미국과 같은 제3국으로 조정자로서 분쟁에 대한 개입 여지가 넓어지면서 자국의 존재감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유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방법으로는 외교적 합의 이외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그 판단에 따르는 방안이 있다. 일본이 독도문제 해법으로 주장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국제재판소는 강제관할권이 없기 때문에 분쟁당사국 중의 한 국가라도 이를 거부하면 재판이 성립되지 않는다. 재판소에 제소하는 것 자체가 영유권 분쟁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국가가 이에 응할 리가 없다.
일본의 역사책임이 전향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동아시아 3국의 영유권 문제는 언제든지 이 지역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작금의 일본사회에서 일어나는 보수 우경화 현상은 영유권 문제의 긍정적인 해결 전망을 지극히 어둡게 하고 있다. 동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경제에 드리워지고 있는 경제적 저성장과 고용 불황으로 인하여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영유권 문제는 언제든지 이들을 군중으로 동원하는 이슈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3국의 정치가나 국민 모두에게 국가 간에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근본적인 성격의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현실 인식을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통된 견해 위에 영유권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방안으로서 민간교류의 활성화 등 외교적 ‘해소’ 방안이 다각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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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영산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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