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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간

개관사정

김태경 기자
- 4분 걸림 -

사람 일을 다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의 일이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 ‘개관사정(蓋棺事定)’으로 이 물음의 답을 하고 싶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관 뚜껑을 덮기까지 숱한 평가를 내리고,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성공할 수도 있고, 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삼가자는 의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사천성의 한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이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 아들인 소계(蘇係)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소계에게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가 보낸 시를 읽은 소계는 후에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서 설객이 되었다고 한다. 두보의 ‘군불견 간소계(君不見 簡蘇係)’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보지 못 했는가 길 가에 버려진 못을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 백년 되어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만들어지며 / 조그만 물웅덩이 속에도 큰 용이 숨어 있을 수 있네. / 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이네(蓋棺事始定) /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두보가 시를 지어 실의에 빠진 젊은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길 가에 버려진 못도 본래 요긴하게 쓰이던 것이었고,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도 본래 활기찬 생명력을 자랑하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백년 되어 죽은 나무도 거문고로 다시 쓰일 수 있고, 조그만 물웅덩이도 큰 용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나중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주목해볼 일이다. 길가의 사물도 이렇게 그 가치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우리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나온 세월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많은데, 어떻게 바로 앞만 보고 그 인생 전체를 논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일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부, 지위, 재산과 같은 외적환경일수도 있고, 마음씨, 태도, 능력과 같은 내면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 외적환경과 내면으로 인해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히어 살아가던 사람이 그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순간이 올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라고 불리는 생 너머의 시간으로, 우리가 살아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시간이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한다는 일이 괴롭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비롯한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그에 따라 끝이 있다. 시작과 끝을 동시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에도 ‘개관사정’의 미덕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초반부의 전개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을 때, 지루함을 느끼며 영화 보는 것을 중단하곤 한다. 하지만 그 지루함을 견디고 영화 후반부의 결말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초반에 나를 힘들게 한 영화는 그 끝에 나에게 보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영화 끝에서 영화의 감동은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영화처럼, 그렇게 끝난 후에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감동의 드라마가 되었으면 한다.

김태경 기자

thankstk1202@kun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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