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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100년, 우리들의 3·1절

독립을 향한 간절한 염원, 그리고 그날의 기억

전인서 기자
- 11분 걸림 -
▲ 3·1운동 당시 군중 / 출처 : 역사편찬위원회

“대한독립만세!” 힘찬 함성이 울려 퍼지던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의 자주성이 일궈낸 위대한 역사가 존재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순국의 열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도록 하자.

3·1운동이 일어난 1910년대는 강국들의 영토 확장 욕심과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 아래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이로 인해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됐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이 원칙은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윌슨 대통령의 발언은 전 세계적으로 민족자결주의를 확산시켰고, 실제로 이 시기에는 강국의 지배를 받던 여러 약소민족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활발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영향을 받아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도쿄의 조선기독교 청년 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2·8 독립 선언이 일어난다. 3·1운동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그동안 눌러왔던 국민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던 다양한 민족지도자들 역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 3·1운동 당시, 한국 광복군들의 서명이 적힌 태극기 / 출처 : 독립기념관

일제의 강압적·폭력적인 통치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새로운 역사가 탄생했다. 탑골공원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탑골공원은 일제가 만든 근대공원이 아닌, 대한제국이 만든 최초의 근대적 휴식공간이라는 점에서 장소적 계승의의도 찾아볼 수 있다. 이날 서울 시민들은 물론,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모인 20만 명의 지방 사람까지 대열에 합류하여 위대한 독립의 물결을 만들어 나갔다. 일본경찰과 군대의 무지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상인들이 상점을 닫고,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며 만세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3.1운동은 도시에서 시작해 농촌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 5월까지 이어졌으며, 처음 시작할 때는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농민이나 노동자들도 참여하게 됐다. 이처럼 3.1운동은 일부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의 결과로 상해에 공화정체의 새로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이 계승을 이루게 된다.

▲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 출처 : 군산시 공식 블로그

그렇다면 3.1운동 당시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있는 이 땅, 군산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서울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군산이었다.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한 김병수 학생의 주도 아래 일어난 이 운동은 ‘군산 3·5만세 운동’이라고 불린다. 이는 전라북도 내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던 만세시위로, 군산 영명학교에서 시작된 시위가 군산 공립보통학교 방화 항일운동, 옥구 대야 항일운동, 임피 장터 만세운동 등으로 번져나갔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부상 195명이라는 사상자를 남기면서 독립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의 군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군산 구암역사 공원에 위치한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기념관은 군산 영명 학교를 본 따 만들어졌으며, 애국지사를 추모하고, 3·1운동과 군산의 3·5만세운동사, 항일운동 이야기 등 1900년대 군산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실제 독립운동에 사용되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다양한 기록과 체험들이 준비되어있으니 우리 민족의 얼을 느껴보고 싶다면 방문을 권고한다.

한편, 군산시는 매년 3월 1일에 우리 선조들이 ‘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던 그 당시를 회고하자는 취지로, ‘3·1절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제10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한 3·1운동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본 행사는 구암동산에서 군산경찰서까지 행진 후 세풍아파트로 돌아오는 3km 구간까지 평화 대행진으로 시작을 알렸으며. 학생대표의 만세삼창 이후 선교사복, 근대교복, 유관순복 등 당시 의상과 태극기를 착용 한 시민들의 만세 행렬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3·1운동과 관련된 공연, 사진전,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가 3월 한 달 동안 진행됐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움직임은 지역 행사에 그치지 않고, 전시회나 뮤지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이 바로 영화 ‘항거’이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교도소에 수감된 민중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3·1운동의 이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유관순이라는 인물뿐 아니라 당시의 평범한 민중들의 활약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조명하고 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인지하기 어려웠던 수감생활 속에서도 유관순 열사는 3·1운동 1주년에 다시 한 번 여옥사 8호실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작은 만세의 외침은 형무소 밖으로까지 확산되어 다시 한 번 많은 민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외치는 계기가 된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

“그럼, 누가 합니까?” 

 

이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 나오는 대사로, 계속되는 잔혹한 고문에도 끝까지 항거하는 유관순 열사에게 이유를 묻자 유관순 열사는 먹먹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한마디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제 한 몸 아끼지 않았던 유관순 열사의 뜨거웠던 용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자 관객으로 하여금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포스터 /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 민족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위기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열사들의 애국정신이 원동력으로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3·1절은 독립운동가들의 단호한 신념과 의지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우리가 이토록 광복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자유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열사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그들의 강인한 의지를 본받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번에 뜨거웠던 그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문득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가 떠올랐다. 부당한 일이 발생해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여기면 외면해버리는 현 사회의 풍조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서 예전과 같은 패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경계가 필요한 사회문제다. 훗날 누군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려 든다면, 그에 맞서 싸울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광복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현재의 한국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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