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은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금강, 남쪽으로 만경강을 끼고 있어 고대로부터 지리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수많은 적들의 침입을 받아야 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서해안과 도서지역 곳곳에 설치, 운영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시설인 봉수는 복잡한 서해안을 따라 선박이 항해하던 항로상에 분포되어 있어 신호전달기능과 같이 군사통신 목적 이외에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돕는 등대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문헌사료에 따르면, 전북 서해안지역의 봉수는 모두 19개 소가 확인되는데, 고창 2개 소, 부안 5개 소, 김제 1개 소, 군산 9개 소, 익산 2개 소로 군산에 설치된 봉수의 수가 가장 많은 점으로 보아 군산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다. 군산에 위치한 봉수는 사자암봉수, 화산봉수, 점방산봉수, 오성산 봉수, 불지산봉수이며, 도서지역에 어청도봉수, 연도봉수, 대장도봉수, 방축도봉수가 확인되었다.
이 봉수들은 그동안 조선시대 5봉수로의 5거 루트(순천 돌산도~서울 목멱산)에 해당되거나 조선후기에 권설봉수(본읍 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였던 본진, 행국, 수영에서 주변의 정보를 신속히 획득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설치, 운영한 봉수)에 해당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일찍부터 해상을 통해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다. 특히 서해안과 남해안은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선박이 항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선박의 운항이 용이하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봉수가 대신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서해안과 남해안에는 대부분의 봉수가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으며, 중요도서지역에도 많은 수의 봉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군산을 중심으로 하는 전북 서해안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해로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백제와 신라, 당, 왜 등이 참여하여 최대 규모의 해상전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고려시대에 각 지방에 설치된 13조창에서 물자를 운반하는 조운선의 항해가 빈번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끊임없이 왜구와 중국 해적선단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는데, 조선 인조 2년(1624)에는 해상도발을 막고자 고군산군도의 선유도에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해군기지인 고군산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전북 서해안 지역의 봉수들도 그 기능과 역할이 조금씩 변화하면서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판단된다. 즉 백제와 고려시대에는 선박의 순조로운 항해를 돕는 기능이 강했던 것이 봉수제가 확립되는 조선시대 세종조에 이르러 해안가의 봉수들은 5봉수로의 5거루트 상에 자리하여 지방의 급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했으나, 도서지역에 있는 봉수의 경우에는 조선이 명나라와의 육로개척이 이루어지면서 봉수의 기능도 점차 퇴색하였다. 그러다가 왜구와 해적을 소탕하여 서해상을 완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군산군도에 고군산진이 설치되면서부터는 도서지역의 봉수가 다시 재편되어 고군산군도에 속한 권설봉수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전북 서해안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봉수들은 지리적인 위치에 의해 보다 이른 시기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까지 단 한차례의 고고학적 시(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봉수의 정확한 축조시기와 구조, 형태 등은 알 수 없다. 또한 봉수의 성격 때문에 가장 조망권이 좋고 높은 위치에 자리하기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등산로, 전망대 등이 설치되어 문화재로서의 훼손이 심각하다. 봉수야말로 군산의 지리적 특성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고 봉수에 대한 정밀조사를 통해 올바른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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