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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황룡학술문학상 학술부문 대상 (독서리뷰)

가난의 고통과 낙인의 공포

황주영 기자
- 49분 걸림 -

가난의 고통과 낙인의 공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손톱」을 통해 본 시대별 한국사회의 ‘가난이라는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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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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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큰 문제는 가난이라는 낙인이다’ - 산업화 시대와 그 이후의 ‘가난’의 문제 - 1
     

    ‘난장이(가족)는 난장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경우 - 3
     

    비소비자로 사는 불안과 공포 -『손톱』의 경우 - 6
     

    열린 사회를 위하여, 혹은 가난도 가난의 낙인도 없는 사회를 위하여 - 9

     

     

    *참고문헌 - 11

     

     

    1. ‘더 큰 문제는 가난이라는 낙인이다’ - 산업화 시대와 그 이후의 ‘가난’의 문제

     

    가난은 꽤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한 사회현상이다, 가난한 사람을 ‘빈민’이라고 칭했으며 과거부터 빈민들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왔다. 재화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조건들 그 조건에는 신분, 성별 등의 다양한 것이 있었고,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한 자는 가난한 빈민이 될 확률이 꽤 높았다. 과거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헨리 8세(Henry VIII)는 빈민, 거지, 부랑자들을 처벌하고 투옥하였다. 가난은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 늪과 같은 것이었다.

    근현대에 와서는 앞서 서술하였던 조건들이 대체로 완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여성도 근로하여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민들의 전반적인 재정 상황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당연하게도 평균적인 가난의 수준이 나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시대별 가난의 모습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가난에 비해 새롭게 생겨난 가난은 그리 단순한 형태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가난은 비교적 1차원적이고 단순했으며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과거의 빈민들은 실제로 먹을 식량이 없어서 아사할 걱정을 하거나 아사했으며 인간이라면 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노동할 권리조차 계급 또는 신분에 따라서 차별받거나 일자리를 구할 수 없거나 힘들었고 그들은 그들의 시간의 대부분을 노동에 쏟아부어도 끼니를 먹는 게 전부인 경우가 많았고 눈앞에 있는 생존의 중요성 때문에 그들에게 재화의 축적은 좀처럼 생각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다.

    현대의 가난은 과거의 가난보다 복잡한 양상을 띤다. 과거보다는 평균적으로 생존의 문제에서와는 조금 멀어진 현대의 가난한 빈곤층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 판단된다. 수입, 거주지, 부모님의 직업, 출신 학교 등등이 그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그의 저서인 『새로운 빈곤』에서 현시대의 빈곤층을 ‘뉴푸어’라고 명칭 하며 그들을 소비자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의 실업은 또 다른 고용을 암묵적으로 의미하는 현상이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일자리의 불안정과 불확실성은 대부분의 직업군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고 개인이 일자리를 잃는 것이 현대에는 꼭 새로운 고용을 의미하는 것이 더는 아니게 되었다. 즉 한정되어있는 일자리 즉 일자리 부족이 문제인 셈이다. 지구 어디에서나 단순한 작업을 하는 단순노동자들을 구하기는 쉬운 일이다. 이러한 단순노동자들은 다른 직군보다 고용 안정성이 훨씬 더 불안정하여 쉽게 교체되고 휘발성이 강한 직업적 특성을 띤다. 현대인들에게 일자리가 생계의 원천인 것은 여전하지만 더는 삶의 의미는 아니게 되었다고 바우만은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가난한 빈곤층이 위반하고 있는 것은 고용의 규범이 아니라 소비 능력의 규범이다. 즉 현대의 빈곤층은 실업자인 동시에 비소비자인 것이다. 그들은 결함 있는 소비자로 정의되어 사회의 골칫거리가 될 뿐이다. 예전처럼 굶어 죽을 걱정은 덜해졌지만, 현대사회의 빈곤층은 결함 있고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그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될 걱정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낙인은 인류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시대부터 마녀라고 낙인찍힌 자들은 합당한 이유 없이 죽임당해야 했고, 조선 시대에 노비의 낙인이 찍힌 자는 평생 제대로 된 대우 없이 끔찍한 형태로 삶을 유지해나가야 했다. 원래의 낙인은 쇠를 달궈 몸에 어딘가 표식의 형태로 새겨졌으나 그 낙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태가 바뀌었다. 낙인찍힌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소비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배제됨을 뜻한다. 이러한 낙인은 그들에게 조용히 입을 닫은 채로 숨죽여 살기를 요구한다. 지금 우리 사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낙인의 대상이 되어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껄끄러워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낙인은 주로 낯설고 약한 사람이면서 소수자들에게 찍혀진다. 경제적 성장과 사회복지 시스템의 발달은 평균적으로 빈곤층의 수를 상당수 줄이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기에 빈곤층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더 소수이면서 낯선 존재가 되었다.

    현대사회의 낙인은 과거보다 그 종류가 다양해진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들은 특히나 인터넷에서 더욱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미성년자 학생을 지칭하는 말인 ‘급식충’, 노인을 지칭하는 말인 ‘틀딱’등이 나이에 의해 그들을 낙인찍는 대표적인 예시이며 옷차림, 소유하고 있는 자가용의 가격, 거주지역, 출신학교, 직업, 소득, 국적, 신체적 특징 등으로 사람들을 판단해 낙인찍곤 한다. 분명하게도 신분제가 존재하던 과거보다는 낙인찍힌 자를 대우하는 정도는 나아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종류는 다양해졌고 세분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낙인 중 가난한 사람이라는 낙인은 굉장히 잔인하지만 가장 벗어나기 힘든 낙인 중 하나이다. 그들은 어린 영유아가 아닌 이상 대부분 청소년기 때부터 그 낙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본인이 그 낙인이 찍혀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체감하게 되고 인지하는 순간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낙인의 대상자가 본인의 낙인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낙인을 내재화시켜 자기 낙인(self-stigma)을 가진다는 점은 사회적 낙인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자기 낙인은 본인 자신을 끝없는 우울감에 잠식시키며 본인의 자아존중감을 낮추기도 한다. 그렇게 낙인찍힌 자는 끝없는 불안 속에 서서히 사회에서 배제되기 시작한다. 낙인을 본인 스스로가 인식하게 되었을 때 여러 가지 방면에서 삶의 만족도는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낙인의 여러 가지 문제 중 가장 잔인한 점은 낙인에 대한 두려움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써 흔히 정신질환이 의심되거나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람의 경우 정신과 진료기록이 남는다는 점 때문에 정신과 방문을 꺼리게 된다. 정신과에 드나든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밝혀졌을 때 어떠한 낙인이 찍힐지, 그 낙인찍힌 자들에게 어떤 대우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인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인식되는 자들에게 주변인들의 신뢰 관계를 상실하게 하고 엄청난 불명예를 선사하는 것이다.

    빈곤층은 사회적으로 많은 낙인에 직면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가난한 빈곤층은 소비사회에서 비소비자로써 배제된 채 무능하고 쓸모없고, 가난은 그들의 무능력의 증거다, 라는 낙인이 일률적으로 찍힌 채로 살아가야 한다. 빈곤층의 이질적이고 해롭고 통제하기 어려운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곤층은 소비사회에서 필요 없고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한순간에 버려질 위험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낙인찍힌 가난한 자들이 벌이는 행위들을 통제하여 단속하고 감독하는 행위는 일종의 도덕적이면서 자선적인 행위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직도 이 사회에 많은 이들이 낙인찍힌 채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방면의 논의가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져 왔다. 서술했던 바와 같이 1970년대의 가난과 현시대의 가난은 그 결이 다르지만, 평균적인 가난의 정도는 개선되었으며 더 과거에 있었던 신분제와 정치 악습의 상당수가 과거보다 사라져 왔다. 이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결과가 아닌 긴 시간 동안의 여러 명의 활발한 논의와 행동 끝에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무작정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한 없는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빈곤층에 대해 지속해서 관심을 가진 채 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가난과 낙인의 문제들은 대부분이 인지하고는 있지만 좀처럼 개선이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자 그렇게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필자 또한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알고는 있지만 큰 관심이 없고 대부분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해당 논문의 작성 계기는 필자의 개인적인 유년기의 경험에 기반하여 계기가 형성되었고 한국문학 중 가난한 계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권여선 작가의 『손톱』이라는 작품이기에 선정하게 되었고 각기 다른 시대의 가난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또한 비교하기 용이한 까닭으로 두 작품을 선정하게 되었다.

    앞서 서술한 낙인찍힌 가난한 빈곤층의 삶은 한국문학 속에서도 그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난장이 가족과 『손톱』 속의 소희가 그 예시이다. 두 작품은 각자 다른 시대의 처절한 가난한 시대의 삶을 너무나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비교하며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 존재할 것이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우리 사회의 가난한 빈곤층들의 삶과 그들에게 찍힌 낙인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난장이(가족)는 난장이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경우

     

    1978년에 출판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300쇄를 돌파하고 130만 부 이상이 판매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한국문학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지점은 분명히 40년 전 도시 빈민층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인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써낸 작가인 조세희 작가는 발간 30주년 인터뷰에서 “작품을 써 내려갈 당시 30년 후에도 이 작품이 읽힐지 몰랐다”며 아직도 청년들이 이 작품에 공감한다는 사실이 괴롭다는 뜻을 내비쳤다. 어떠한 점이 그렇게나 1970년대의 실상을 현대에까지 공감하게 되었는지 현대와는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알아보려고 한다.

    1970년대의 대한민국이 처했던 사회현실은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노동구조가 갑자기 바뀌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당연하게도 경제는 성장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의 대중문화 또한 확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회의 급격한 변동의 중심에 위치하여 사회를 통제하고 있었던 정치 권력은 그들의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했다. 1970년 전태일의 죽음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노동자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했고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급속하게 성장한 경제와 확산한 대중문화는 우리 사회의 대부분이 소비사회의 일원이라고 느끼게 했다. 도시의 중심부에서는 매일 극장에 영화가 상영되었고 사람들은 대중음악에 열광하고 TV라는 새로운 오락거리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중에 도시 외곽, 그 밖의 지역에서는 여러 명의 또 다른 난장이들이 처참한 빈민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수많은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서 중농 이상의 농민들은 중산층으로 도시에 편입되게 되었고 빈농 출신들은 도시의 빈민이나 저임금 노동자로 도시에 편입되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산업화 시대에 도시에서 최하계급에 있는 이들의 삶을 잘 보여준다. 작중에서 ‘행복동’에 거주하고 있던 난쟁이의 가족은 도시를 재개발하는 진행 과정 중에서 집을 철거당하고, 공업지대인 ‘은강’으로 본인들의 집을 이사하게 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잔인함에 직면하게 되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본인이 생각하는 모순을 시정해야 한다는 당위가 좌절되었을 때 이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작중에서 난장이 가족은 의식주에서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집을 철거당할 위기에 처한다. 경제적인 급성장을 우선시하던 경제 정책과 독재로 인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도시의 빈민이나 노인, 노동자의 인권이나 복지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도시 재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사회의 외곽지역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그들의 삶은 더욱 심각하고 처참한 위기상황에 빠져들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자들의 삶을 결정지었던 도시 재개발 사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재개발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빈민들로부터 어떠한 대안도 없이 삶의 유일한 주거 공간을 빼앗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판잣집이 철거되면서 거주자들은 그들의 명칭이 철거민으로 바뀌게 되고 재개발이 완료된 이후 그 집에 입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입주권을 받았지만 새롭게 짓게 되는 아파트의 분양비와 내부 시설비 등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 입주권을 헐값에 넘긴 채 결국 길거리로 앉아버리게 된다. 1970년대 빈민층들은 값싼 임금 때문에 매달 버는 수입에서 본인들의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 금액이 별로 없었기에 근로소득으로 저축해서 아파트 분양비와 시설비를 지불하고서 재건축되는 아파트에 들어간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가난은 처참하고 현시대의 가난보다 1차원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며 과격한 양상을 띤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작중의 난장이 가족만 하더라도 본인들의 기초적인 유일한 삶의 터전이 없어져 버렸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빈민층이나 노인에 대한 복지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던 당시의 가난은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야 했고, 쉬지 않고 일해도 대부분 노동자의 노동력은 굉장히 싼 값에 판매되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더불어 노동자에 대한 대우나 근무환경 또한 굉장히 열악했다. 그들이 공장에서 꾸준히 일하며 낮은 임금을 받는 동안 공장의 사장이나 작품 속의 부동산 업자 같은 소수의 부유층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부의 양극화 양상이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작품 속에서 지배계급들은 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을 만들어 낙인을 찍고 그들을 도시의 적재적소에 분산시킨다. 작중에서 공장의 사장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을 통제한다.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사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며 부당한 대우나 임금, 근무환경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월급이 밀린다고 해도 침묵해야 하고 그들을 보호해줄 제도적인 장치 또한 부족했다. 작품 속의 영수(난장이의 아들)는 노동자들의 처우나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을 위해 이야기하거나 파업을 일으켜 그들에게 낙인찍혔다. 그 결과 그는 그가 다니고 있던 공장에서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를 해고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에도 연락해 더는 그는 주변의 공장에서 일자리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도시의 빈민층들에게 일자리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그들의 직접적인 생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소비사회에서 일원으로서 배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이 찍는 낙인은 이렇게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난장이 일가의 가장인 ‘김불이’는 산업화 과정에 소외된 빈곤한 노동자의 삶을 신체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낸다. 150㎝에 몸무게 32㎏의 아주 왜소한 체격의 그는 성장을 멈춘 장애인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노동자 동료들 사이에 제대로 끼지 못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하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간으로서,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회체제의 인간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한 사회에서부터 소외된 계층 중 한 명이다. 문제는 이런 비정상적인 신체적인 특성이 생산성 증대와 자본의 축적을 최우선으로 중요시하고, 기계화가 지금보다 훨씬 진행이 덜 됐지만 공업, 특히 제조업이 엄청나게 유행하는 산업화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결국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에서 그가 가진 신체적 특징 때문에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아예 사회에서 소외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시대는 지금보다 장애인에 대한 제도가 지금보다 여실히 부족했고 작품의 난장이인 ‘김불이’는 신체적으로도 불구이지만 사회적으로도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시대에도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경제적 여건이 좋아지려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지만 1970년대에는 당연하게도 지독하게 가난하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난장이네는 다섯 명의 가족의 형태를 띤다. 그들은 서울의 낙원 구 행복동에 살다가 집이 철거를 당하며 ‘은강’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난장이는 삶을 마감하게 된다. 원래 난장이의 아들인 ‘영수’는 본인에게 찍혀진 ‘빈곤층’이라는 낙인이자 계급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는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본인이 짝사랑 하는 상대인 ‘명희’와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의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현실을 전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서 계속에서 일해야 했고 그는 검정고시로라도 학교를 졸업하고자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현시대도 그렇지만 더욱더 잔인하게도 이 시기의 가난은 대물림을 끊기가 쉽지 않았다. 가난은 그들의 꿈을 좀먹었다. 결국 영수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낙인찍히고 본인이 다니는 회사의 회장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동생인 영호는 형인 영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영호는 영수처럼 본인이 다니는 인쇄소에 한 번 항의해보기도 하지만 영수만큼 적극적으로 항의하진 않는다. 또한 영수처럼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1970년대 대다수 노동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임금은 곧 그 가족의 생활비였다. 그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순간 그들은 낙인이 찍혀버린 채로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컸고 그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노동자들이 부당한 임금과 대우를 받으면서도 별다른 말 없이 계속 출근하게 만드는 통치 도구로서의 역할로 사용되었다. 막내 영희는 순결을 버리면서까지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아오고 ‘은강’으로 이주하면서 영이를 도와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수가 가장 과격하고 극한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면 영희는 실질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서 1970년대의 가난은 생존과 긴밀하게 직결되어있고 그 형태가 일자리가 있어도 가난이라는 낙인을 지우기 힘든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임금에서 최저 생활비를 제하면 별로 남는 금액이 없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기가 너무 힘들어 빈민들은 값싼 임금 때문에 돈을 거의 저축하지 못했고 작중에서 부동산업자나 공장의 사장 같은 자본가들은 이러한 실정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낙인찍고 그들을 통제하고 이용하여 더욱더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자연스럽게 부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고 이러한 실정 속에서도 기존의 농민들은 계속해서 도시로 모여들었다.

     

    3. 비소비자로 사는 불안과 공포 - 「손톱」의 경우

     

    1970년대에 비해서 현 시대의 상황은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비교적 풍요로워진 세상이 되었다. 그 시절의 가난보다는 현 시대의 가난이 평균적으로는 더 나아졌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면 그 시절의 가난은 정말 먹을 음식이나 살아갈 집, 병원비가 없어서 생존을 위협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 당시보다 막대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여러 가지 논의 끝에 사회적인 복지에 대한 인식과 그 시스템이 여러모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의 가난의 숫자는 1970년대에 비해 현시대가 상당수 줄어들고 그 가난의 정도 또한 평균적으로는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경제와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가 모든 것이 확실하게 해소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새롭게 대두된 사회적 문제 또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OECD 국가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출산율과 최고 수준의 자살률, 높은 청년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최근 들어서는 노인 빈곤율마저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경제성장률은 평균적으로 양호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실업률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는 형태의 고용이 없는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대기업들도 사람을 어느 정도 채용해야 하는 공채제도를 버리고 수시채용제도를 채택하는 것으로 고용정책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통계와 더불어 우리는 기사로 접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과 생계의 어려움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새로운 시대에도 가난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유경쟁체제를 중심으로 선보인 시장 중심주의적인 정치경제는 절대적인 가난과 빈곤을 줄이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게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개인의 이익 추구가 모이면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공공의 이익으로서 환원되게 된다는 적하효과(tricle down)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시장경제가 단순히 경제성장이나 삶의 질의 개선, 절대적인 가난의 감소와 같은 밝은 면들만 우리의 삶에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가 성장하는 동시에 그것은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우리 사회 전반에 만들어내기 시작했다.시장경제체제에서 돈이 돈을 만드는 속도가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하면서 인간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분해 내기 시작했고 극도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낙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실제로 IMF에서는 2015년 경제적인 관점에서 “부의 낙수 효과는 완전히 틀린 논리”라고 밝히기도 했다. IMF는 150여 개국에서 사례를 분석해본 결과, 상위 20% 계층의 소득이 1%포인트 증가할 때마다 이후 5년의 성장이 연평균 0.08%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하였으며 보고서의 결론에는 하위계층의 소득을 늘려 중산층으로 만들고 그 중산층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저소득층을 쥐어짜는 것이 결국 노동 생산성 저하로 이어져 소득 불균형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불가피하게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권여선의 단편소설 모음집인 ‘아직 멀었다는 말’ 속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이다. 주인공인 ‘소희’는 엄마, 언니와 함께 살다가 그 둘에게 버림받고 빚과 함께 남겨졌다. 소희는 항상 남겨진 빚과 생활비에 대하여 생각하며 그것에 얽매여서 살고 있다. 소희는 가난하다. 그녀는 실제로 한 달에 십만 원을 더 벌기 위하여 출퇴근이 한 시간 반 더 걸리는 곳으로 이직한다. 짬뽕에 매운맛을 추가하고 싶어도 500원을 더 내야 한다는 말에 포기하기도 한다. 그녀의 한 달 수입에서 식비와 교통비, 월세, 통신비 등의 기초적인 생활비를 지출하고 그녀에게 남겨진 채무 중 원금의 일부와 이자를 상환하고 나면 그녀가 매달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매우 제한적이다. 소희는 『손톱』에 상처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 상처에 약을 지속해서 발라 그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오로지 약국에서 파는 약만으로는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무리였다. 지속해서 연고를 발라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소희는 병원에 가볼 생각도 하지만 병원비가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지내다가 이제 더는 이 상처를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소희는 결국 병원에 방문해서 치료를 받게 되지만 여전히 치료비가 비싸다는 생각을 한 채 병원을 나선다.

    시장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시장경제 만능주의는 성장과 분배를 지속해서 갈등시키며 우리에게 불합리한 사회의 재화와 소득분배의 문제를 외면하게 했다. 때문에 우리 개인 이 사회적 성장을 위해 요구되는 불합리한 경쟁을 기꺼이 승인하고 내면화하면서 불안과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라고 규정짓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에는 분명하다. 개인마다 그들이 가하는 노력의 총량은 분명히 다를 것이고 경쟁이 공정하고 불공정함을 떠나서 제대로 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들도 분명히 여럿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경쟁 자체가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번듯한 직장을 가지려면 대부분의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하지만 작중 소희의 경우 부모님이 연락이 두절되어 지원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저축한 돈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소희에게는 빚이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하지 않고 대학에 갈 준비를 위해 공부를 한다던가, 어떠한 자격증을 위해, 어떤 시험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희는 사실상 선택권이 크게 제한된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서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우선은 돈을 버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가난은 개인의 선택권을 없애버린다.

    이처럼 경제적 불평등이 곧바로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다시 그러한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한 개인의 미래의 직업 전망에 대한 직접적인 제한으로 이어지는 형태가 바로 사회경제적 질서의 불공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공정한 현실은 한국사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부정할 수만은 없이 이해된 현실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소득과 부의 양극화는 교육기회와 사회의 양극화로 곧바로 직결되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해서 절대다수가 원하는 사회경제적 지위에 접근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를 소수의 상위계층의 자녀들에게 더 쉽게 갈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그들이 그들의 부를 훨씬 용이하게 세습할 수 있는 경로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본인들의 자녀를 다른 자녀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하고, 더 잘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애덤 스위프트(Adam Swift)가 지적했듯이, 기회의 평등을 이유로 바쁘고 피곤한 나머지 자신의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지 않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다른 본인들의 자녀 교육에 충실한 부모들의 행위에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행위이다.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면서 경제적 지위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런저런 차이를 허용하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앞서 서술하였듯이 개개인의 선천적인 재능이나 개인적인 능력은 물론 그들의 노력까지도 일정한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말하는 ‘공정한 기회’에서의 ‘공정한’은 그 단어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단어의 경계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존엄한 삶의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본인들의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에 얼마나 더 큰 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지, 다른 방면에서도 얼마나 더 지원해줄 수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등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재능과 능력의 발휘가 제한될 수 있고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접근할 기회가 결정되는데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어날 때의 신분이 한 인간의 운명을 미리 결정지었던 것에서 돈이 그렇게 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나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신분은 어떻게 해도 타파하기가 어려웠고 지금은 노력하면 될 수 있는 확률이 있지만 둘 다 태어난 순간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제대로 교육을 받으려면 부모님을 잘 만나야 한다.”, ‘금수저’ 등의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자녀들의 차후의 경쟁력에 미치는 그 자녀들의 부모님이 가진 재력과 사회적인 위치의 영향을 그만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 합의를 보여주고 있다. 엄밀히 말해 그와 같은 사실이 승인되는 사회에 완전히 평등한 경쟁이 주류가 되는 사회라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가난은 평균적으로 과거보다 확실하게 개선된 형태를 보이나 그 가난에 대한 낙인은 어쩌면 과거보다 더욱더 가혹한 형태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과거보다 전반적인 살림이 나아진 현시대에서 가난은 예전보다 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낙인을 찍는 대상이 더욱더 다양해지고 찍는 낙인의 종류 또한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지금은 거주하고 있는 지역, 또는 아파트에 따라 낙인을 찍고, 다니고 있는 학교의 학군, 입고 다니는 옷의 브랜드,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에 따라서 낙인을 찍기도 한다. 과거에 존재했던 피고용인이라는 낙인 또한 그 정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에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을 작품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소희는 매장의 점장에게 신발 한 켤레를 강제로 강매당하게 된다. 그것이 할인된 가격일지라도 소희는 그것을 구매해야 한다는 점장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구매하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소희는 그것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고 그것을 구매한 뒤 다시 어떤 이에게 팔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점장은 자신이 강매한 상품을 출근할 때 신고 출근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결국, 유니폼과도 같은 출근 복장을 피고용인에게 강매한 셈이다. 작중에서 소희의 모습은 앞서 서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언급한 소비사회에서 배제된 삶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계속해서 일하고 있고 사실 밥을 굶을 걱정은 하지 않지만, 소비사회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된 소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4. 열린 사회를 위하여, 혹은 가난도 가난의 낙인도 없는 사회를 위하여

     

    1970년대의 가난은 1차원 적이고 더욱 처절했다. 그 시기의 가난은 생존과 곧바로 직결될 정도로 1차원적인 가난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현시대에는 그 기준이 달라졌다. 경제성장과 복지 시스템의 발달로 평균적인 살림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이다. 일례로 1970년대에 집에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굉장히 잘 사는 집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현재에는 중산층 정도의 집안에서 자동차 한 대 정도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가정에 대해 사람들은 낙인을 찍기 시작했고 또 다른 여러 종류의 새로운 낙인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공장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그들은 처우개선에 대해 건의하지 못한다. 그들이 건의해 봤자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고 실제로 작중에서 공장 노동자 중에 처사에 대해 말한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그들의 생존권인 직업을 잃기 때문에 그 두려움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고용주에게 피고용인은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해야만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손톱』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등장한다. 『손톱』에서는 소희는 직장의 점장에게 반강요적으로 스포츠화의 구매를 요구받는다. 여기에서도 소희는 거절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본인의 직장 생활에 있어서 불이익 혹은 해고가 있을 수 있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구매하게 된다. 나중에는 이러한 스포츠화를 신고 출근하라는 요구까지 받게 된다. 이것은 고용주 혹은 상급자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통제가 가능한 사람’ 이라는 낙인을 찍어 본인이 원하는 바를 낙인찍힌 자에게 강요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스케줄의 갑작스러운 조정이나 추가근무를 마음 놓고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시대의 현실이다. 그 정도가 약해졌을 뿐 1970년대에 존재하던 낙인이 희미해진 채로 현시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경제적인 것이 지금보다 인생에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중에서 난장이 가족의 장남인 영수는 학업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는 지식인이 되어서 이 빈민가에서 벗어나 지금 처한 현실을 타파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경제 상황 때문에 중학교 삼학년 초에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의 부모님은 영수의 학업의지를 존중하여 그를 밀어주고 싶었으나 밀어 줄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앞서 서술했던 바와 같이 선택권이 없어진 그는 그의 꿈을 접고 인쇄소에서 일을 해야 했다. 이러한 현상과 비슷한 현상이 『손톱』에서도 묘사된다. 소희는 어렸을 때 백 미터 달리기에서 웬만한 남자아이들보다 달리기가 빨랐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체육 선생님에게 육상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게 된다. 본인도 그럴 의사가 있었던 모양인지 소희는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육상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소희의 어머니는 육상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소희의 말을 거절한다. 훈련비, 용품비 등을 지원해 줄 여력이 안 된다는 뜻이다. 1970년대의 가난한 자보다 현시대의 가난한 자가 선택권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예전보다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출근해야 할 정도의 가정은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지원이 늘었으며 대학에 와서도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가 생겼기 때문에 그 선택권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가난한 자는 현실에서 여러 가지 선택이 제한된다. 우리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미술과 같은 예체능 계열을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박사과정까지 전공한다고 하면 암묵적으로 ‘저 집은 집안 여력이 괜찮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본인의 자아실현이 제한을 받게 된다.

    『손톱』의 작중에서 소희는 항상 혼자서 머릿속으로 생활비에 대한 계산을 한다. 본인의 소득에서 이런저런 기초 생활비를 제외하면 얼마가 남고 남은 빚 중 얼마를 상환할 수 있고 얼마를 저축할 수 있다는 복잡한 돈 계산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어떤 것을 구매할 때 그것이 사소한 것이라도 이번 달 예산에 얼마나 타격이 갈지를 계산한다. 심지어는 병원비가 아까워서 병원에 가는 것을 계속 미루고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여기에 얽매여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과 비슷한 장면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도 묘사된다. 영수가 어머니의 가계부를 보게 되는데 작중에서 영수는 그것이 생활비가 아닌 생존비라고 말한다. 그 생존비 내역에는 정말 그야말로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들인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큰 사치 없이 그렇게만 소비하면서 일했는데도 그들의 생활수준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소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병원비가 아까워서 미루고 짬뽕을 더욱 맵게 하려면 500원을 추가해야 해서 그 주문을 취소시킬 정도로 아끼면서 사용하는데 그녀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70년대에 비해 현시대의 임금은 그 시절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이러한 임금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훨씬 다양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1970년대나 지금이나 계층 간의 이동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 많은 사실로 보인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1970년대는 절대적인 가난과 낙인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면 현시대는 가난과 낙인이 그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공존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시대이고 그 낙인이 찍히면 가혹한 삶은 더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즉 1970년대와 비교해 봤을 때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낙인이 찍혀지고 있고 가난은 그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더욱더 처참해졌다. 이러한 문제들은 물론 1970년대와는 다르게 많은 부분들이 실제로 개선되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과 소설 『손톱』에서 공통점이 발견된 것처럼 아직도 가난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일부분 1970년대와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가지고 있는 숙제는 좀처럼 해결이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고 많은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논의들로 인해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개선된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나 무제한적인 지원을 해주자는 말이 아니다. 인력과 재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고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노력이나 재능, 능력에 의해 차이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불합리함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러한 분야에 대해서 논의하며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탐구해야 하고 가난도 가난의 낙인도 없는 사회로 나아가야 함이 분명하다.

     

     

     

     

     

     

     

     

     

     

     

     

    참고자료

     

    권여선.『손톱』. 문학동네. 2020.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 지성사, 1978.

     

    참고문헌

     

    박채리, 정순돌, 안순태, 「노인에 대한 낙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연령별 집단비교」. 󰡔노인복지연구󰡕, 2018.

    신용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_산업화 시대 한국의 자화상」. 󰡔내일을 여는 역사󰡕. 2008.

    이충한, 「경제적 불평등과 시민적 삶」, 󰡔철학논총󰡕, 2015.

    이평전, 「1970년대 사회생태론적 사유와 정치의식 연구-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중심으로」, 󰡔문학과 환경󰡕. 2014.

    이현석, 「선의 의무와 악의 권리 : 1970년대 사회적 상상력의 두 양상 - 『당신들의 천국』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중심으로」, 󰡔한국현대문학연구󰡕, 2014

     

    지그문트 바우만, 이수영 옮김, 󰡔새로운 빈곤󰡕, 천지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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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유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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