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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진과 함께하는 군산의 역사와 문화 산책

발산초등학교에서 만난 보물과 일제강점기

배소연 기자
- 5분 걸림 -

 군산 대아면에 위치한 발산초등학교 입구를 들어서면 여느 시골 초등학교와 같이 넓은 운동장과 나지막한 교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입구를 따라 들어서면 한쪽에는 시멘트로 만들어 그럴 듯 하게 페인트칠을 한 각종 동물상과 생각하는 사람이 알록달록 키작은 꽃들과 어우러져 오는 이들을 반긴다. 초등학교 시절 일년에 한번 볼까 한 동물들을 매일 타고 매달리며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재밌는 동물원을 지나 교사 뒤쪽으로 가면 석물들이 낮은 철제 울타리 안에 즐비하다. 초등학교와 예사롭지 않은 석물들. 어울리지 않는다. 왜일까?
발산초등학교는 해방 직후인 1947년 9월 1일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일본인 농장주의 땅으로 농장의 곡물건조장터였다고 한다. 그는 주조업자로 술을 만드는 쌀을 구하러 곡창지대와 항구가 있는 이 곳으로 건너왔다. 시마타니는 농장을 운영하고 쌀을 거두는 일 외에 문화재 수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조리실 뒤편에는 생소한 3층짜리 콘그리트 건물 한 채가 있다. 시마타니 금고로 불리는 이 건물은 2005년 ‘구 일본인농장 창고’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있는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수집하던 시마타니가 골동품을 보관하던 말그대로 보물창고다.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작은 좁고 높은 건물에 철제 금고문이 달려있고, 창문에는 쇠창살과 철판으로 이중 잠금장치를 하였다. 덩치가 큰 석조물들은 정원석으로 사용하고 금고 안에는 도자기와 서화와 같은 것을 보관했다고 한다. 어디서, 언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안에 꽉차게 들어있던 수많은 문화재들은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텅비어 있지만 성벽과 같이 단단해 보이는 건물과 시건장치들을 보면서 시마타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시마타니 금고에서 10여 m 떨어져 20여 개의 석물들이 열지어 서 있다. 누군가의 무덤 앞에 세워져 그 주인을 지켜주고 있었을 갖가지 동물상, 석등, 비석받침 등 참 다양하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들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얼마나 한꺼번에 많은 문화재들을 이 곳으로 옮겨와 다시 세웠기에 어떤 것은 짝이 맞지 않고, 어떤 석등은 화창도 없어져 버렸다. 이 가운데 눈에 띠는 군산에 단 2점 밖에 없는 보물도 여기에 있다. 많은 석조물 가운데 원래 있던 장소를 알 수 있는 2점이 보물이 되었다. 지금은 발산리 석등(보물 제234호)과 발산리 5층 석탑(보물 제276호)이라고 불린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석등은 받침의 가운데 기둥에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의 모습이 새겨졌는데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 자리하는 ‘봉림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자동차로 한 시간은 족히 달려가야 나오는 먼 거리에서 이 커다란 석탑과 석등을 싣고 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되는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문화재를 해체하고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새로 제작해 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5층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간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균형잡힌 듯 세워져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불안정해 보인다. 옥개석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네엣...분명 5층이라 했는데 하나가 부족하다. 봉림사지에 놓고 온 것인지, 오다가 잃어버린 것인지, 깨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어 보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깝다. 군산에 보물이 있다고 해서 설레임에 찾아간 발산초등학교 교정에는 아픈 역사 속에서 해맑게 우리의 미래가 뛰어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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