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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와 만남을 통한 我의 변화

제33회 황룡학술문학상 문학부문 가작(평론)

- 20분 걸림 -

조르바와 만남을 통한 我의 변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인 조르바를 통해 변화하는 자아

1.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성과 감성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자 ‘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리스인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나’는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이며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진 자본가이다. 나의 친구 스타브리다키는 내게 “잘 있게나,이 책벌레야”라는 인사를 남기고 조국을 위한 전쟁터로 떠난다. 책벌레라는 단어는 나의 삶을 응축한 한 마디였다. “내 삶이 집약되어 있는 그 말 한마디에 그동안 살아 온 내 인생이 얼마나 역겨웠던가! 내가 인생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데, 어쩌자고 같잖은 책들과 잉크로 검게 더럽혀진 종이더미에 그토록 오랫동안 내 자신을 처박아 두었단 말인가!”

나는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고 책더미에 박혀 사는 삶을 벗어나 육체적인 노동, 민중의 삶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한다. 이에 나는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 광산 하나를 빌려서 크레타 섬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살아보자고 마음먹는다. 크레타 섬으로 떠나는 여정에서 나는 우연히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나는 조르바에게서 강렬한 첫인상을 받고 조르바를 광산의 십장으로 임명한다. 나는 조르바와 크레타 섬에서 광산운영, 수도원 개축 등의 일들을 겪으며 조르바에게 깊은 감명을 받는다. 조르바는 내가 지금껏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나이였다. “살아 숨 쉬는 가슴과 엄청나고 대단한 말발, 야성의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내, 아직도 어머니 대지에 연결 되어 있는 사내였다. 예술, 사랑, 아름다움, 순수, 열정, 이 모든 단어들의 의미가 이 노동자가 지껄여 대는 순수하고 단순한 말에 의해 명료하게 전달되었다.” 결국에 크레타에서의 사업은 실패했고 나는 파산을 했다. 하지만 조르바와의 교류를 통해 나는 이성과 감성의 대립에서 감성에 충실해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2. ‘나’와 조르바의 이해

나의 본질적인 문제는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생생히 느끼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나의 태도에 있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는 이성적 사고를 통한 형이상학적 인식에 불과했다. 나는 ‘기쁨’, ‘슬픔’과 같은 개념을 이성으로는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었으나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을 감성적으로 느끼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인생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인생은 잘못된 궤도를 가고 있었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도 단지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타락했기에 여자하고 사랑을 나눌지, 사랑에 관한 책을 읽을지,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책 읽는 걸 고르겠는가!” 나는 조르바처럼 감성적 욕망에 충실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반대로 하고 있다.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세계를 살아간다. “어린아이였던 그때는 우물에 뛰어들 뻔했고, 어른인 지금은 ‘영원’이라는 말에 빠져들 뻔했으며, 아주 많은 말에도 뛰어들 뻔했다. ‘사랑’, ‘희망’, ‘조국’, ‘하느님.’ 한 단어, 한 단어를 물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위험에서 벗어나 몇 단계는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기껏해야 단어만 바꿔 가면서 그걸 해방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이 년 동안은 부처라는 말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감성의 욕구를 부정하려 노력했다. 배고픔, 성욕과 같은 욕구들을 나는 단테와 붓다의 글을 붙잡고 떨쳐내려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 희망이라는 단어.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책에 파묻혀 산다. 조르바는 이런 나를 비판한다.

“이건 옳고, 저건 틀려. 이건 사실이고, 저건 사실이 아니야, 이놈은 옳고, 저놈은 틀려.‘ 그런데요? 그래서 뭐요?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때, 난 당신 팔하고 가슴팍을 지켜봅니다. 당신 팔하고 가슴팍이 어떤 줄 알아요? 꼼짝도 안 해요. 한 마디도 안 하지요. 피 한 방울 안 흘려요. 자, 그러면서 뭘 가지고 이해한다는 거요? 머리로? 웃기지 말아요!”

조르바는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이다.

 

‘진짜 감정’의 이해와 더불어 단테와 붓다의 도움으로도 떨쳐내기 어려웠던 것은 강력한 감성의 욕구였다.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의 실패였다.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이성과 감성의 갈등을 비유한 ‘마차’가 선로를 이탈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는 감성적 본능의 욕구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는 나가 이성과 감성의 갈등 사이에서 고통을 느끼는 이유이다.

반면에 조르바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였으며 본능과 감성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조르바는 자신이 내킬 때면 산투르라는 악기로 자신의 감정을 연주했고 춤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조르바는 자유인이었다. 자신이 지금 당장 춤을 추고 싶다면 춤을 춰야 해야 했고 노래를 하고 싶다면 노래를 해야 했다. 이런 조르바의 성격은 풍부한 감수성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조르바는 사람을 보거나 꽃핀 나무를 보거나, 시원한 물 한잔을 보아도 똑같이 깜짝 놀라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날마다 모든 것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본다.” 나는 현상세계를 조르바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조르바의 존재와 그가 보여주는 사물에 대한 인식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르바를 이해 할 수 없는 미지의 인물로 여기지 않고 조르바를 동경한다.

“잠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 하나만 갖고, 그동안 배우고, 보고, 들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나도 조르바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가, 위대한 진짜 알파벳들을 처음부터 배울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할 길은 얼마나 다른 길일까! 오감을 완벽하게 훈련하고, 육체도 그리 할 것이다. 그러면 오감과 육체는 즐기고, 이해할 것이다. 달리는 법과 씨름하는 법, 헤엄치는 법, 말 타는 법, 노 젓는 법, 차 운전하는 법, 권총 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영혼을 육식으로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 안의 영원한 두 적수를 화해시킬 것이다.” 조르바가 다니는 학교란 현실세계였다. 조르바는 전쟁에도 참여하고 여러 육체적 노동을 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었다. 이는 나의 삶과는 대조를 이룬다. 나의 삶은 평범하고 정적인 지식인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조르바를 동경했던 이유는 단순히 조르바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기 때문은 아니다. 조르바는 단순히 술이나 성욕과 같은 욕구에 충실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조르바는 자신의 감성적인 삶, 본능에 충실했던 삶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르바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마치 공자(孔子)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는 종심(從心)의 경지였다.

 

“나는 이 인간이 부러웠다. 이 인간은 육신과 피로 살아 왔다 -싸우고, 죽이고, 키스하면서- 내가 혼자서 펜대와 잉크를 통해 배우려고 끙끙대던 그 모든 것들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독하게 하나하나 짚어 가며 풀어 보려고 기를 쓰던 그 모든 문제들을, 이 인간은 칼을 차고 산속 그 신선한 공기 속을 누비면서 다 풀어 버렸다.”

 

나가 그토록 고민하고 알고 싶어 했던 사랑, 희망, 조국, 하느님에 대해서 조르바는 자신만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애(生涯) 동안 책이라고는 신밧드 한 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조르바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서 ‘나’가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3. ‘나’가 느끼는 해방감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성으로 감성을 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그 강박관념의 빗장이 크레타에서 조르바와의 우정을 쌓아가는 동안 조금씩 풀어졌다. 나는 광산에 업무 처리 할 일이 있어 나 대신 조르바 에게 돈을 맡겨 보낸다. 하지만 조르바는 광산을 위해 사용할 돈을 여자를 만나고 노는데 다 써버린다. 하지만 ‘나’는 이런 조르바를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조르바의 귀환이 반가웠지만 그에게 화가 난 척 퉁명스레 대한다. 조르바는 나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나의 고향인 크레타의 노래를 불러준다.

 

용기를 가져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위험이여, 닥쳐오라!

용기만 잃지 않으면, 싸움에서 꼭 이기리니!

 

늦은 밤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에 광산에 있던 인부들이 조르바 근처로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에 맞춰 인부들과 조르바는 혼연일체가 되어 노래하고 춤을 췄다.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 온몸으로 전율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고 소통하고 있었다. 감정을 느끼고 감정에 충실히 춤으로 혹은 노래로 감정을 표현했다. 나가 감정을 느끼면 이 감정을 몸으로 느끼기보다는 머리로 감정을 이리 저리 재보는 것과는 대비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광산 근처에 자고 있던 많은 인부들이 잠결에 노랫소리를 듣고는 자다 일어나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와서는 우리 주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다들 자기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고 있다 보니 다리가 근질근질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지자, 반라에, 헝클어진 머리에,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어둠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인부들은 조르바와 산투르 주위로 원을 그리고 자갈이 깔린 해안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전율을 느끼면서 조용히 인부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진짜 광맥이다! 이거면 됐다.”

 

나는 조르바와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살과 따스한 공기를 몸 그대로 느끼며 음미한다. 나는 이런 과정에서 육체의 깊은 행복을 느낀다. 나가 진정한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은 모든 것을 잃은 순간이었다. 광산에서 잃은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 수도원 개축 공사를 시도했지만 개축 공사마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개축 공사를 위해 설치했던 지지대가 무너져 내려 크레타에서의 사업 실패가 명백해지던 날, ‘나’는 조르바와 최상급 크레타 포도주를 마시며 그에게 춤을 가르쳐줄 것을 청한다.

 

“이제 벗어나는 겁니다, 조르바! 내 인생은 변했습니다! 춤이나 춥시다!”

 

감성적인 행동을 표출하는 것을 기피하던 ‘나’가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는 말에 조르바는 반색을 하며 기쁨에 껑충 뛰어 오른다. 나는 조르바와 양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밤새도록 춤을 추고 장난을 치다가 자갈밭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완전한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깨어 보니 새벽이었다. 나는 해변을 따라 마을을 향해 급히 걸어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 완전한 기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평범한 기쁨이 아니었다.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우며, 이치에 맞지도 않는 기쁨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치에 위배되는 기쁨이었다. 이번 일로 모든 걸 잃었다. 돈, 인부들, 케이블 선, 수레들 모두 말이다. 우리는 작은 항구를 건설했지만 선적할 게 하나도 없었다. 파산한 것이다.

그랬다. 예기치 않은 해방감을 맛본 게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마치 필연적이라고 하는 복잡하고 어두침침한 미로 한 구석에서 우연히 혼자 놀고 있는 자유를 발견한 듯했다. 그리고 즉각 그 자유와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을 잃는 순간 나는 슬퍼하거나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완전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그 해방감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였던 자유의 발견이었다. 자유는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것도, 사회에서 떨어져 홀로 고요히 있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순간, 그 순간 ‘나’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되었다.

 

4.자유에 대한 이해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에 관한 대표적인 책으로 꼽힌다. 카잔차키스는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필체로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케릭터의 우정을 그려냈다. 조르바에서 보이는 자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조르바는 흔히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소유자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다. 노래를 하고 싶으면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춘다. 낮에는 열심히 노동을 한다. 노동으로 지친 몸을 음식과 포도주로 생기를 회복해 저녁에는 여자들을 향한 호색적 본성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조르바에 관한 자유의 이해는 그가 보여줬던 성욕이나 식욕 같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따른 충동적 행동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조르바가 보여줬던 자유의 의미는 조르바가 이룩한 깨달음의 경지에 있다. 조르바는 많은 경험과 성찰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했다. 조르바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빈부, 정치, 종교, 조국 등 그 어떤 외적인 환경의 연줄도 그를 얽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방황하는 인간이다. 감성적 욕구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이성을 통한 깨달음 혹은 이성을 통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했다. 조르바는 이런 나를 까마귀에 비유한다. 까마귀는 처음에는 까마귀처럼 걷다가 비둘기의 멋진 걸음걸이를 보게 된다. 까마귀에게는 비둘기처럼 꽁지를 세우고 멋있게 걸어야 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까마귀는 비둘기를 따라하지만 여의치 않았고 결국 자신의 걸음걸이 마저 잊어버리게 됐다. 그래서 까마귀는 비둘기 같지도 않고 까마귀 같지도 않은 엉성한 걸음을 걷게 되었다. 나는 이성을 통해서든 감성을 통해서든 깨달음을 통한 자유의 경지에 도달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나는 엉성한 걸음걸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가로막는 것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과 외부적 환경들이었다. 나는 어떤 때는 조국이라는 연줄에 또 어떤 때는 신이라는 연줄에 얽매여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조르바가 한 말은 다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광적인 충동, 그 초인적인 갈망에 사로잡혀 세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이 되어 갔다. 한계선을 그어 놓고, 불가능한 일과 가능한 일, 신적인 일과 인간적인 일을 구별한 다음, 연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연줄을 꽉 붙들었다.”

 

나를 얽매고 있는 연줄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그 연줄을 끊어야만 했다. 조르바는 나에게 충고를 한다. 자신이 좋아했던 버찌를 끊은 방법을 알려주면서 말이다. 이에 나는 조르바의 방법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연줄을 끊겠다고 말한다.

 

“나아졌지요, 조르바.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 방식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당신이 버찌를 대한 방식으로 책을 대할 거에요. 종이를 물리도록 씹어 삼키면 구역질이 나겠지요. 그러면 싹 다 토해 버리고, 딱 끊어 버리는 겁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나는 조르바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유로운 영혼의 숨결과 정신을 느꼈다. 이런 모습이 ‘나’가 조르바라는 위대한 인간을 동경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또한 나의 인생에 있어서 조르바와의 만남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조르바를 만난 후 내면의 감정을 거부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느끼고 감정에 충실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크레타에서의 사업을 뒷정리하고 나와 조르바는 이별을 한다. 이후 5년이 지나 조르바는 숨을 거두며 나에게 유서를 남긴다. 유서의 내용은 ‘나’가 뭔가를 깨달았기를 바라는 당부의 내용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악기 산투르를 나에게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향한 조르바의 애정과 우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며, 깨달음을 당부하는 조르바의 말에서 자유란 깨달음의 경지에서 오는 종심의 경지와도 가깝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자유란 깨달음을 통해 마음에 도(道)를 세워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하여도 법도에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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