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1,2 - 아트 슈피겔만쥐
권희섭, 권희종 옮김, 아름드리미디어(1994)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학창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전자오락, 만화책, 무협지 이 세 가지였다. 용돈을 받으면 이것들로 모두 써 버리는 통에 부모님께 자주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점차 전자오락이나 무협지에는 흥미가 시들해졌지만 만화책만은 아직까지도 즐겨보고 있다. 다만 이제 한 쪽 벽면의 책장을 가득 채운 만화책을 보고도 부모님이 혼내거나 하시지 않는다는 점은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만화의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문화의 하위 장르나 또는 단순히 어린이 시기에 한정된 교육적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 어떤 문화적 장르도 그 자체에 문제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여 전개되는 표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만화라는 장르가 소설이나 시 등 다른 읽기 장르들과 비교했을 때 이종의 것들과 결합하기 쉬운 유연성을 가지다보니 보다 손쉽게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또 이런 점들로 인해서 종종 오해를 받아온 면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만화 역시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 표현 방식이나 주제의 다양함을 접해보고 판별하는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트 슈피겔만의 「쥐」(전 2권)는 그 훈련의 과정에서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놀라움은 그러한 역사적 경험을 한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의 ‘아버지’가 현재 보여주는 삶의 방식에서 온다. 가령, 아들 내외와 차를 타고 가다가 만난 흑인 히치하이커에게 시종일관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는 등 때로 비열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차가운 시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 역시 어긋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우리의 기대 역시 나치 독일이 유태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오류와 선입견, 그리고 논리적 비약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수용소의 생존자에게 우리가 도덕성을 요구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없다. 역사적 정보를 통해서 경험하게 된 교훈을 그 일을 직접 겪은 개인에게 동일한 크기로 강제하는 것 역시 정당한 일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의미가 부여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실제 당사자들에게는 철저하게 개인적 크기의 체험으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같은 고민 끝에 도덕 교과서와는 다른 방식, 즉 선악을 가르고 확실하게 구분 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끝없는 의심의 힘 그 자체를 뛰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화장르 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거나 구겐하임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한 「쥐」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 모든 평가와 상관없이 정말 놀랍도록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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