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물고기처럼
나희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莊子』의 「大宗師」에서 빌어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 어떤 감정의 실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대체로 우리를 쓸쓸하게 합니다. 실패한 사랑은 특히 그렇겠지요. 모든 사랑의 출발이 그렇듯이 그것이 처음부터 쓸쓸한 것만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끌림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그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었다면, 과연 심정이 어떨까요. 사랑에 대한 의구심은 사실 참 위험합니다. 이 의구심은 때로 사랑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서 ‘두려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작품에 딸려 있는 각주를 보면 장자에서 인용한 부분이 그 실체를 말해줍니다. 물이 다 말라 곧 죽을 운명에 처한 물고기들이 침을 뱉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두려움을 짐짓 사랑이라고 애써 가장하기보다는, 떨어져 서로를 잊는 것이 아예 낫다는 것이지요.
최악의 순간에야 서로 비비적거리고 적셔주는 것은 과연 사랑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은 비겁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껴안고 비비적거린다면 그때 사랑은 참 황량하거나, 구차하고 나약한 일일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그랬을 뿐이라면, 사랑의 본질이나 실체, 그 알맹이는 참 초라하겠지요. 사랑이 존재의 나약함을 감추는 허울뿐이라면 우리는 왜 그토록 못 이룬 사랑에 목말라 했었던가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우연히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에서 화자는 옛사랑을 다시 발견합니다. 사랑의 실패가 사랑을 이처럼 황량하게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은 처음부터 없고, 우리가 사랑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두려움만 있었던 것일까요. 이 작품은 사랑을 둘러싼 모든 달콤한 수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있습니다. 몸 안의 물기가 다 빠지고 말라비틀어진 황어처럼, 이래저래 사랑의 실체는 결국 황량한 것인가요. 그러니까 그럴수록 더 열렬히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요.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지금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