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하늘이 높고 맑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잠시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가까운 옥구향교를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황토색 담장과 잿빛 기와, 울긋불긋한 단청, 붉은 기둥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이 매우 매력적이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옥구향교는 태종 3년(1403) 옥구읍 이곡리 교동에 세워졌고, 세종 4년(1422) 옥구읍성이 축조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인조 24년(1646)에 지금의 자리인 상평리로 옮겼다고 한다. 옥구향교는 현재 옥구읍성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관아시설이어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다.
향교 입구에는 20여 기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이 지역을 다스리던 수령의 선정비(善政碑: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로 최근 향교 입구 가까이 옮겼다.
향교에서는 두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기능과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능이다. 이러한 기능에 의해 향교의 건물 배치가 뚜렷이 구분되는데,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향교가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주향교와 같이 전면에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옥구향교는 후자로 경사진 터에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어 앞에 강학공간이, 뒤 높은 곳에 배향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공간배치를 따라 옥구향교 경내에는 모두 8동의 건물이 있다. 향교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과 전사재, 양사재 등 교육과 관련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넓지는 않지만 아늑한 마당을 지나면 비교적 높은 계단과 만난다. 계단을 올라서면 내삼문을 지나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과 같은 높이에 문창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높은 계단 위에 있는 이곳이 배향공간으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 송(宋) 4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배향하고 있다. 문창서원에는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옥구향교는 대부분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기능은 거의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어 봄, 가을 두차례 석전대제를 열고 있다. 석전대제는 전통 유교의식으로 성균관과 전국에 있는 230여 개의 향교 대성전에서 공자 등의 위패를 봉안하는 의식으로, 매월 2월과 8월의 정해 놓은 날에 공자를 비롯하여 옛 성인들의 학덕을 추모하며 행해진다. 절차를 보면 영신례, 전폐례, 초헌례, 공악,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철변두, 송신례, 망료의 순서로 진행된다. 옥구향교 석전대제는 지역의 유림 100여 명이 참여하여 오전동안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석전대제가 끝나고 난 뒤 향교 마당에서 이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소박한 상차림이 베풀어지며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옥구향교는 일반적인 향교의 역할 외에 단군을 제향하는 단군묘와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한 문창서원, 세종대왕 숭모비와 비각이 있어 이채롭다.
향교 경내에는 원래 향교 건물과 관련이 없지만 향교 내 문창서원을 세우고 배향하고 있는 최치원과 관련된 자천대가 있다. 자천대는 옥구향교 대성전과 함께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료(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선연리 동산에 있었는데 이곳이 군용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상평마을로 옮겼다가 1967년 다시 지은 것이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즈넉한 명륜당 툇마루에 앉아 높지만 답답하지 않은 대성전 계단을 마주하고 가을 바람 속에서 담소를 나누는 것, 최치원이 시와 노래를 읊던 자천대에 올라 향교 경내와 마주해 보는 것, 곧 치러질 석전대제를 구경해 보는 것, 올 가을 옥구향교에서 해봄직한 작은 여행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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