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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별'이라는 건 그의 생각이 아니라 세상이 그에게 주입한 생각이었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별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 있지 않겠나?"
       박범신 소설 『은교』 中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쓴 파커 J. 파머는 ‘온전한 삶이란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분리되지 않은 삶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삶에 대해서 나는 ‘자신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나는 삶’이라 표현하고 싶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 누군가가 비추는 타인의 빛이 아닌 자신의 빛으로 삶을 밝히는 삶, 그것이 온전한 삶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쉽지 않은 것인지 혹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꽤나 다양한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어 ‘나’라는 존재를 위협한다. 그러한 위협을 겪다보면 결국 ‘자신’은 없어지고 껍데기뿐인 인간만이 남는다. 사실상 사람들, 특히 나와 같은 20대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 스스로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현실의 팍팍함에 우린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그 죄가, 나를 텅텅 빈껍데기로 만든 죄가 어디 현실뿐이랴.
 
 각각의 존재는 자신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때 존재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가치는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관심을 갖는 것에서 시작한다. 시작은 간단하다.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갖는 것, 혹은 앞으로의 미래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왜’라고 하는 키워드가 중요하다. 사실 대학생들 혹은 막 졸업한 사회인들이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말 거만이며 또한 오만이다. 하지만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왜’라는 질문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의문을 던지는 연습보다 수긍하고 따라가고 맞춰가는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음표를 던지는 것 자체가 사회적 반역이며 공동체적 이단자로 오해받기 때문에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너무 인색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삶을 사는 것 보다 사회의 시선에 맞춰가는 것에 더욱 익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난 가끔 사회에 반항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반항이 꼭 어떤 사회적 말썽을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는 시도,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별을 아름답다고 말 할 때 그 별을 잔인한 것처럼 보인다 말 할 수도 있으며 때론 슬프다고 말 할 수 있는 반항, 그런 반항이 필요하다. 그럴 때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나다움이 드러난다. 자꾸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태도, 본인이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게 자신답게 사는 온전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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